엘레아학파
크세노파네스 / 파르메니데스 / 제논 / 멜리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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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노파네스 / 파르메니데스 / 제논 / 멜리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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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남부 엘레아 지방 출신으로, 철학을 운문과 시로 남겼다. 서양 사상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일자를 주장한 그의 사상을 어떻게 넘어서야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남겼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은 일자이다. 오로지 존재는 하나다라는 주장이다. 이는 다수성을 주장한 피타고라스나 헤나클레이토스와 반대되는 생각이다.
우리가 감각하고 지각하는 세계는 다수가 있는 세계다. 파르메니데스는 감각적 세계는 거짓된 것으로서 의견의 세계라고 말한다.
어떻게 존재가 일자인지를 파르메니데스는 아래처럼 설명한다. 왜 존재가 일자이냐.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존재로부터 나왔거나 비존재 = 무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비존재 즉, 무(nothing)라는 것은 생각과 말의 대상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자체는 생각될 수도 말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이 비존재로부터 나왔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존재로부터 존재가 나왔어야 한다. 그런데 이 또한 성립할 수가 없다. 존재하는 것이 다른 존재하는 것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그 두 존재 사이를 가르는 무가 중간에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마찬가지로 무(nothing)에서 존재가 나오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므로 모순이다. 따라서 만물은 그저 하나로 존재하는 일자이지 다수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다수성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변화도, 운동도, 부분도 갖지 않는 것이 존재라는 것이다.
제논은 상대방의 견해가 맞다는 것을 전제했을 때, 터무니없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상대방의 견해가 틀렸음을 증명하는 귀류법을 활용한다.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견해를 옹호하기 위해 여러 역설을 만들었다. 운동과 그 운동을 위해 전제로 하는 다수성을 부정하기 위한 논변들이다. 감각으로 보여지는 다수성, 변화, 운동은 오류이고, 오직 감각의 눈, 정신의 눈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해야함을 강조하기 위한 방안이었던 것이다. 이때 주장한 역설들은 현대에 오며 모두 깨지게 된다.
아킬레우스가 100m 가는 동안 거북이 10m을 간다고 가정하고, 거북이 아킬레우스보다 100m 앞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상태에서 아킬레우스가 거북을 따라잡기 위해 100m 앞으로 갔다고 하면 동시에 거북은 10m를 나아간다. 그러면 거북과 아킬레우스는 10m만큼 떨어져 있는데, 이 때 아킬레우스가 다시 10m를 더 나아가면 거북은 1m를 이동하여 거북이 다시 1m 만큼을 앞서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킬레우스가 다시 1m를 가면 거북은 0.1m 더 나아간다. 따라서 아킬레우스는 아주 미세한 거리만큼을 항상 뒤처지게 되므로 아무리 가까워져도 거북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다.
문제는 아킬레우스가 거북을 따라잡기 위해서 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데에 있다. 무한히 많은 과정을 유한의 시간 내에 끝낼 수 있는가, 이를 정량적으로 표현하면 무한히 많은 숫자의 양을 더했을 때 과연 그 결과가 유한한 양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즉 제논의 역설은 무한히 많은 항을 더했을 때의 결과가 무한대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찌른 질문이었고, 시간이 지나자 무한급수와 같이 무한히 많은 항을 더해서 유한의 결과로 수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해결된 것이다. 즉 거리와 시간을 무한히 나눠 더해도 그 값은 무한하지 않으며, 결국 정해진 시간 안에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따라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