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투스학파
탈레스 / 아낙시만드로스 / 아낙시메네스 / 헤라클레이토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 물
이처럼 철학은 그때그때 변하는 인간 삶에서 눈을 돌려 그 배후에 있는 '만물의 원천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원천이라는 단어, Arche는 모든 만물을 지배하고 있는 근본 원리를 뜻한다. 여기에 대해 탈레스는 '물'이라고 답한다.
이때의 물은 자연 철학, 자연 과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존재자는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존재자들의 존재함이란 무엇인가, 즉, 만물을 예외없이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었고, 그에 대한 대답이 물이라고 하니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최초의 철학자들은 철학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최초에 위치하는 사람은 이미 존재하는 철학이 없었다. 어떤 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 탈레스는 이미 존재하는 언어들로 대답해야 했고, 위대한 질문을 떠올리고 탐구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의 단어를 붙잡은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질문은 위대했으나, 답변이 빈곤했던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처했던 운명적 빈곤한 사정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 아페이론 Apeiron
이어지는 철학자로 아낙시만드로스는 경계, 한계를 뜻하는 Peras라는 단어에 접두사 a를 붙여 경계와 한계를 부정한다는 의미의 무한정자(Aperion) 개념을 만들어낸다. 탈레스가 고육지책으로 물이라는 단어를 꺼내들었을 때,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물이라는 것이 만물의 원천이라고 해보자. 그런데 세상에 보면 물이 있던 곳에는 곧 물이 말라서 건조함이 들어오게 된다. 또한 건조한 곳에 다시 비가 내려 습기가 생겨나게 된다. 습기와 건조함이라는 상반된 것들이 한번씩 지배하면서 지나가는 것이 세상의 흐름이다. 즉, 물이라는 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번갈아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물이 만물의 원천이라면 세상의 어떤 사물들보다도 더 근본적인 지위를 차지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물이 원천인데도, 달느 여러 종류의 사물들과 같은 수준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같은 수준의 반대되는 것과 번갈아가며, 서로 싸우고 대립하며 세상을 지배하는 것으로서의 물은 만물의 원리라기보다는 만물의 일부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따라서 물은 결코 만물의 원리가 될 수 없다. 다양한 사물들의 세계(Physics)에서 각각의 성질들의 정체성은 비교하는 두 가지 사이에서 성립한다. 밝다, 어둡다라는 개념은 다른 것보다 밝은 것, 다른 것보다 어두운 것이라는 상대방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정체성이다. 이와 달리 만물의 원천은 그와 반대되는 상대방을 통해서 정체성이 확보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즉, 그 정체성이 규정되지 않는, 한정지을 수 없는 무엇, 상호 정체성을 얻는 사물들과는 상관없이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서 어떤 것으로도 정체성을 갖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 아낙시만드로스는 Aperion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낙시메네스, 공기 프네우마
한편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을 만물로서 살아있게 하는 원천으로 공기를 말했다. 여기서 공기는 단순히 질료로서의 공기와는 다르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공기 = 프네우마 = 숨결 = 바람 = 생명의 원천
모든 생명은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다. 영감, inspiration의 어원은 바로 들숨, spirit spiritus로서 안으로 정신을 흡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당시에는 없었던 단어인 '영혼'을 공기로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정신을 살아있게 하는 spiritus로서의 영혼을 말했다고 할 쑤 있다.
이러한 만물은 공기다라는 이론이 그 앞의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에 비해 경험적으로 여겨지며 그 가치가 낮게 느껴질 수 있다. 무한정자는 추상적인 개념, 정신의 눈으로서만 느낄 수 있는 개념인 반면, 공기는 상식적인 경험처럼 비춰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서사시 일리야스 중, 전쟁하다가 장수가 찔렸던 창을 뽑으니 북풍의 입김이 불어와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내용에서 엿볼 수 있듯, 이때의 공기는 자연과학이 말하는 공기라기보다는 삶을 주는 숨결, 즉 영혼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또한 이 프네우마는 사도 바울이 말한 영혼으로도 연결된다.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영혼과 육체를 별개로 생각했다. 이는 이후 칸트의 사상 등에서도 보이는 흐름으로. 공기 개념은 철학사 최초의 중요한 첫발이었다고 할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 불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근원을 불이라고 말했다. 이 불은 끊임없는 운동, 변화를 상징한다.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문장으로도 알려져있다. 모든 것은 변화 속에 있으며, 이 변화는 대립자 간의 상호작용 즉, 투쟁을 뜻한다.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을 '만물은 흐른다' 즉, 판타 레이 (panta rhei)로 설명했다.
고정되어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계속해서 흐른다, 모든 것은 움직인다고 설명했다. 즉, 모든 것은 운동한다는 것인데, 운동이라는 것은 다수성을 전제로 한다. 부분, 부분, 부분들로 이루어진 다수가 서로 다루게 배열됨으로써 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부분에 기반한 다수성이 없으면 운동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만물이 흐른다는 것은 모든 존재는 다수성을 기반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법칙인 로고스 Logos 에 따라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했는데, 개발적인 의견으로부터 떠나서 만물의 공통적인 로고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지점에서 헤겔의 변증법과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노예다'라는 문장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존재는 근본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도록, 생의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는 인간은 없다. 우리의 삶은 완전히 우리의 자유에 맡겨진 존재다. 따라서 위 문장은 자유는 노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모순인 것이다. 따라서 이는 모순을 깨고 다른 상태로 이행해나가야만 하는 것, 운동해야만 하는 상태인 것이다. 고정된 하나의 정적인 상태를 기술하는 문장이 아니라, 찢고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이처럼 한 상태 안에 운동을 야기하는 내재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을 보이는 의미로서의 변증법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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