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스의 여신도들
에우리피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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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코스 여신도들》(: Βάκχαι, Bakchai 또는 The Bacchantes)은 가 쓴 작품이다. 에우리피데스 사후 에 《》와 《의 알크마이온》와 함께 삼부작의 일부로써 에서 초연되었고, 그와 이름이 같은 아들 또는 조카가 작품을 연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디오니소스와 그를 따르는 신도들, 그리고 그의 신성을 부정했던 펜테우스의 이야기를 재현했다. 펜테우스와 그 일족은 광기에 사로잡혀 고통 받다 희생된다. 에우리피데스는 이 또한 신의 계획이요 뜻임을 강조하며 겸허한 삶의 자세를 강조한다.
-위키백과
신 제우스와 인간 세멜레 사이의 아들인 디오니소스는 세멜레의 죽음 속에서 가까스로 제우스 손에 거두어져 자라게 된다. 황야를 떠돌고 아시아를 떠돌던 디오니소스는 어머니의 고향인 테베로 돌아와 자신을 믿지 않았던 테베인들에게 어머니의 원수를 갚고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믿게하겠다고 천명한다. 테베의 여인들은 디오니소스의 말대로 키타이론 산으로 가 축제를 벌이자, 테베의 왕인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를 체포해 가둔다. 전쟁을 하려던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의 꾐에 넘어가 여인들의 축제를 훔쳐보러 키타이론 산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어머니인 아가베의 손에 찢겨 죽게 된다. 아가베와 그녀의 아버지 카드모스는 디오니소스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거절당하고 신의 예언을 받아들이게 된다.
디오니소스는 아마도 '너 때문에 흥이 다 깨져버렸으니 책임져'로 알고 있을 것 같다. 술의 신으로 유명한 디오니소스는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명랑하고 밝기만 한 신은 아니었다고 한다. 많은 이름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디오니소스는 이름이 다양하다. 출생에서 비롯한 죽음의 신, 부활의 신부터 황야와 아시아를 떠돌던 것에서 비롯한 황야의 신, 초목의 신, 그리고 술의 신, 광기와 극단의 신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극에서 묘사된 디오니소스제의 모습은 양 극단을 달린다. 눈이 뜨인다라는 표현이 쓰이는데
그러고는 뺨을 핥고 있는 뱀으로 목을 휘감았습니다. 또 더러는 산양이나 늑대 새끼에게 사랑스러운 듯 웃으면서 젖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 또 그녀들 중 한 여인은 지팡이를 들어 바윗돌을 쳐서 맑은 물이 나오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한 여인은 그의 바코스 지팡이로 땅을 치니까, 신계서 주시는 붉은 포도주가 솟아 나왔습니다.
이런 설명만 들으면 자애롭고, 풍족한 자연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식을 전하는 사자도 너무 신기해서 이 광경을 펜테우스가 봤다면 디오니소스를 사랑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어서 그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이야기도 전한다.
한 여인은 팔로 젖소를 껴안았습니다. 또 다른 여인은 송아지를 산 채로 갈갈이 찢고 뜯어서 갈빗대는 이리저리 날고, 살덩이는 나뭇 가지에 걸쳐 있고, 붉은 비가 푸른 소나무 숲 빽빽한 속에 내리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대단히 사납다는 황소까지도 그들 연약한 여인들의 손에 힘없이 땅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힘을 부리는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문명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간 여신도들은 자연의 한없는 자애로움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연의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준다. 자연의 파괴력은 우리도 알고 있는 것이다. 지진, 태풍 각종 자연재해부터, 우주의 별들, 은하계를 보고 있노라면 그 안에 사람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얼마나 짧은 시간을 사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신도 마찬가지로 자연처럼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마찬가지로 자신을 믿지 않는 존재들에게는 한없이 잔인하다.
디오니소스는 하늘의 신 능력으로 태어나신 이. 그러나 그는 또한 지상에 기쁨과 즐거움 가져오며 이 세상 그지없이 사랑하시네. 특별히 평화와 번식을 가져오는 그들을 사랑하시네. 위대하신 신을 불평하지 않고 재산이 없다고 경멸하지 않고 그는 모든 사람에게 포도주 주시네. 그러면 그들에겐 슬픔 없고 청결해지리. 그가 준 기쁨을 차 버리는 이들에게만은 그의 저주의 불길이 덮치리.
재산이 없어도, 약자여도 모두에게 포도주를 주는 포용을 보여주는 것 같으나, 신을 믿지않는 자에게는 한없이 가혹해질 수 있음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테베의 젊은 왕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제의 모습을 성적 타락으로 상상한다. 흔한 말로,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 것'이다. 이런 지혜가 없는 상태를 Amathia, 무지라고 한다.
우리의 아내들과 누이들이 집을 빠져 나가 저 그늘진 언덕 숲속으로 모여들어 그 새로 나온 신 디오니소스라나 뭐라나 하는 자를 경배하기 위한 광란의 잔치에 침례하러들 갔다는구나. 거기엔 크고 깊은 술독이 한가운데에 있다고 한다. 처녀고 유부녀고 가릴 것 없이 신을 경배하기보다는 사랑을 하려고 제각기 은밀한 곳을 찾아 몰래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바코스의 불꽃이 그들을 뒤엎고 있다고 한다. 아니 그들은 아프로디테를 경배하고 있는 것일게다.
성적 타락을 상상하고 있는 펜테우스에게 테베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이런 무지를 깨워주고자 말하지만 펜테우스는 이해하지 못한다.
당신의 그 보잘것없는 권리가 절대적이라고 생각지 마시오. 또한 그런 생각이 지혜로운 것이라고도 알지 마시오. 디오니소스가 어떻게 여인들로 하여금 억지로 취하게 했겠습니까? 그 여인들 자신 안에 그러한 도취가 간직되어 있는 것이죠. 광적인 잔치에서는 어느 누구의 깨끗한 마음도 더러워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강한 긍정은 강한 부정이라는 말처럼, 강한 거부감은 강한 호기심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호기심이 결국 펜테우스를 비극적인 결말로 이끈 것처럼 말이다.
밤에 술을 마시고 예배를 한다고 하니, 펜테우스는 더욱 안좋게 보며 말한다.
펜테우스 : 그 예배하는 시간이 밤이냐, 낮이냐? 디오니소스 : 대개 밤에 하죠. 어둠이란 신비롭고 엄숙하니까요. 펜테우스 : 흥! 여인들과 같이 예배를 한다지? 그건 너무 흉칙하고 위험한 일이야. 디오니소스 : 낮에도 마찬가지요. 신성하지 못한 것을 좇는 사람에게는 낮도 흉칙하고 위험하오.
전에 한 드라마에 나온 '통금시간이 있으면 있는대로 낮에 할 거 다한다'는 대사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화가나 신도들을 감옥에 넣으려고 하는 펜테우스에게 테베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말한다. 극에서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전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곡물, 즉 밥만 먹고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술로 은유되는 그 이상의 의미, 자유, 사유를 필요로 한다. 이를 신에 빗대서 표현한 대목이다.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신이 있소. 그 하나는 데메테르라고 하는 땅의 여신으로, 그대가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소. 그 여신은 건조한 곡식으로 인간을 채워 줄 것이오.
또 다른 한 신은 앞에 말한 여신의 일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세멜레로부터 출생하게 된 힘이오. 그 새로운 신은 포도에서 흘러 나오는 수분으로 된 액체인 술을 발견했소. 그것으로 그는 사람들의 슬픔을 희미하게 해준다오. 또한 술은 고통과 공포의 경험을 냉정한 망각 속에 가라앉게 해주지요.
데미안의 구절을 떠올리게도 해준다.
"그(신)는 선, 고귀함, 아버지다움, 아름답고 드높은 것, 감상적인 것이지. 옳아! 그러나 세계는 다른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어. 그런데 다른 건 죄다 그냥 악마한테로 미뤄지는 거야. 세계의 이 다른 부분이 통째로, 이 절반이 통째로 숨겨지고 묵살되는 거야. 바로 사람들이 신을 모든 생명의 아버지로 기리면서도 생명이 근거하는 성생활은 간단히 묵살하고 어쩌면 악마의 일이며 죄악이라고 선언하는 거야! 이런 신을 여호와라고 존경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하지 않아, 조금도 반대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존경하고 성스럽게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해. 인위적으로 분리시킨 이 공식적인 절반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신을 위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를 위한 예배도 가져야 해. 그게 올바른 일인 것 같아. 혹은 예배를 하나 더 만들어야 할 것 같아. 악마도 그 안에 포함하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세상일들이 일어날 때 그 앞에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되는 신을 위해서 말이야.
사자의 말에도 불구하고, 펜테우스는 바코스 신도들과 전쟁을 하겠다고 나선다. 이때 디오니소스가 계속해서 만류하는데, 대사와 지문을 보면 디오니소스가 상당히 기회를 여러번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펜테우스 : 이 이상 이놈하고 상대를 할 수 없다. 대체 네가 누구인데 우리를 이렇게 모욕하는 것이냐? 어디 네가 아직도 그렇게 종알댈 수 있나 한번 내 솜씨를 보려는가! 디오니소스 : 잠깐만! 아직도 이 오해가 풀릴 길은 있을 테니까. (펜테우스는 그의 군대를 맞으러 성문으로 가기 시작한다) 펜테우스 : 내가 내 노예에게 복종을 해야만 한다는 말인가? 디오니소스 : 내가 창이나 칼 없이 그녀들을 이 곳에 오도록 하지요. 펜테우스 : 뭐라구! 이건 어떤 계략이 있는 모양이구나. 디오니소스 : 뭘 무서워하죠? 당신을 구하기 위한 계략밖에는 없소. 펜테우스 : 이 산 언덕에서 영원히 춤을 추기 위한 계략을 쓰고 있는 것 아냐! 디오니소스 : 그렇소, 그것이 나의 술책이오. 그러나 그것은 신과 함께한 것이오. 펜테우스 : (그에게서 돌리면서) 야, 내게 방패와 창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너는 입 닥쳐! 디오니소스 : (한참 물끄러미 보다가 이젠 포기한 듯이) 그래? 맘대로 해보시오! (그는 다시 펜테우스를 질시한다. 군기 정비원이 갑옷을 가져온다. 디오니소스는 명령조로 말한다) 그대는 바코스 신도들이 산에서 기도하는 것을 바라볼 테지? 펜테우스 : (이후로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가 그에게 말을 하게 하는 대로 하고, 자기의 힘을 전혀 쓸 수 없게 된다) 물론 그러지. 테베의 모든 돈을 다 사용해서라도.
지문에서 대놓고 설명해주고 있는 부분이 흥미롭다. 한참 물끄러미 보다가 이젠 포기한 듯이라는 대목과, 이후로 펜테우스는 힘을 전혀 쓸 수 없게 된다는 부분이 그렇다. 그리고 이 이후로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가 시키는 대로 여장도 하고 디오니소스의 신도들 차림으로 변장하게 된다. 이런 순간은 한 번 더 있었다.
디오니소스 : (그를 돌보아 주면서) 그대는 그녀들의 광기가 진실인 것을 안다면 나에게 감사와 사랑을 주겠는가? 펜테우스 : (그의 말은 듣지 않고) 이 지팡이를 이렇게 바른손에 들어야 그녀들과 같겠지?
또 하나 재미있는 부분은 광적인 흥분 상태에 대한 설명이다. 사자가 전해줬던 것처럼 여신도들은 예배를 하면서 광적인 흥분 상태를 경험하고 그 속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데, 디오니소스의 꾐에 넘어가 산으로 향하기 전의 펜테우스도 같은 모습을 보인다.
디오니소스 : 아아! 보기를 열망하는 자는 보지 못하리라. 그 마음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갈망하기 때문이오. 펜테우스여! 이제 여인의 차림으로 디오니소스의 성자 마이나드스처럼 예배자들과 그대의 어머니의 행동을 정탐하기 위해 어서 떠나시오. (펜테우스, 바코스 신도들과 같은 옷차림을 하고 등장한다. 어떤 마력에 의한 광적인 흥분 상태에 있다) 내 보기에 그대는 카드모스의 다른 공주들 차림하고 같군요. 펜테우스 : 그렇죠. 내 눈은 아주 빛난답니다. 저 하늘에서 비치는 해도 두 개, 일곱 겹 문의 테베도 두 개. 내 앞에 걷고 있는 저것도 황소인가? 너의 머리에는 뿔이 있으니, 너는 뭐냐? 인간이냐, 짐승이냐? 확실히 너에게 황소가 얹혔으니. 디오니소스 : 노기에 찼던 신은 아주 부드럽게 우리와 함께 계시네. 신은 그대가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하여 주시기 위해 그대의 눈을 뜨게 하셨네.
해도 두 개, 테베도 두 개로 보이고, 사람인지 짐승인지 헷갈린다는 내용이다. 이후에 펜테우스의 어머니가 펜테우스를 짐승으로 착각하는 복선 같기도 하다. 이에 대해 디오니소스는 오히려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이 도취 상태를 종교에서는 종종 경험했다는 간증도 듣게 되는데, 오히려 이 대목에서는 <스티브 잡스>의 환각제 LSD에 대한 언급이 더 연상된다.
"신비의 시대에 성년이 된 셈이지요." 잡스의 회상이다. "우리의 의식은 선과 LSD에 의해 고양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나이가 들어서가지도 환각제가 자신을 깨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평가한다. "LSD는 심오한 경험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 중 하나였지요. LSD는 사물에 이면이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약 기운이 떨어지면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할 수 없었지만 뭔가를 보았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저의 인식을 강화해 주었습니다. 돈을 버는 것보다 멋진 무언가를 창출하는 것,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역사의 흐름과 인간 의식의 흐름 속에 되돌려 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렇게 산으로 간 펜테우스는 어머니 아가베의 손에 찢어져 죽게 된다. 이때 사자가 와서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여신도들에게 이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굉장히 직접적인 대사로 이 상황에 대한 '정의'를 따져 묻는다.
사자 : 에키온의 아들, 우리의 왕 펜테우스가 죽었습니다. 코로스장 : 신 만세로다. 신은 능력을 보이셨도다. 사자 : 무엇이라고요? 우리 왕의 참변을 듣고 오히려 즐거워하는 모양이군요. 코로스장 : 우리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크오. 우리는 이국의 여인들이거든요. 이제부터 우리는 핍박을 받을 염려가 없거든요. 사자 : 이 테베가 그대들의 경멸과 버림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코로스장 : 우리가 복종하는 디오니소스 신 외에는 누구도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 분만이 가장 높고, 우리가 사랑하고 복종하는 분입니다. 사자 : 그대들을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건 너무합니다. 여인들이여, 사람이 죽었다는데 그렇게 좋아하다니요.
사자는 직접적으로 너무하다고 말한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하는 것, 신의 뜻이 이루어졌으니 그 안에 있는 사람의 결과는 개의치 않는다는 것 그 태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보이던 코로스장도 결국 아가베의 상황을 목도하고는 참혹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 손으로 죽인 아가베는 자랑스럽게 아들의 머리를 들고와 아버지 카드모스에게 칭찬해달라고 말한다. 이에 카드모스는 아가베가 도취 상태에서 빠져나오게 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바라보게 한다.
아가베 : 이런 저의 용감한 행동에 아버지께서도 자랑스러우시겠죠? 그리고 행복하시죠? 카드모스 : 아, 이 기막힌 슬픔. 너를 차마 바라볼 수 없구나. (...) 나는 울어야 한다. 너의 가장 사랑하는 이, 또한 나의 사랑하는 손자를 위해 울어야만 하겠다. (...) 아, 네가 저지른 일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네 자신이 알 수만 있다면! 그 고통이 얼마나 크랴. 차라리 지금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만 있다면 행복하진 못할지라도 자신의 불행은 모를 것인데... 아가베 : 어째서 아버지는 저를 칭찬하고 축복해 주시지 않고 오히려 꾸짖으십니까? 카드모스 : (약간 주저하다가) 네 눈을 들어 저 푸른 하늘을 쳐다보아라. 아가베 : 그렇게 하죠. 그런데 왜 저에게 하늘을 바라보라고 하시죠? 카드모스 : 네 눈에는 하늘이 변하였느냐 아니면 그대로 있느냐? 아가베 : 이전보다 더 빛나는군요. 좀더 하늘이 밝게 보이는군요. 카드모스 : 광란에 도취해 있는 것을 아직도 너는 느끼느냐? 아가베 : (당황해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러나 이제 정신은 좀 맑아지는 것 같아요.
카드모스는 아가베의 모습을 보며 슬픔을 나눈다. 그리고 디오니소스가 내린 신의 뜻에 대해서도 함께 아가베와 함께 수행한다.
아가베는 디오니소스에게 용서를 빌지만, 디오니소스는 들어주지 않는다. 아가베가 당돌하게도 신도 인간처럼 하느냐고 따진다. 이 극을 쓴 작가는 이 말을 정말로 하고 싶었다는 것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아가베 : 디오니소스여, 저의 말을 들어 주소서. 저희는 죄인이로소이다. 디오니소스 : 이미 늦었느니라. 여유를 주었을 때 너는 나를 모른다고 하였느니라. 아가베 : 그렇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복수의 손은 너무도 맵고 강합니다. 디오니소스 : 너는 신인 나를 조롱했다. 그것이 네가 받아야 할 벌이니라. 아가베 : 신께서도 인간이 할 때와 같이 해야 하나요? 디오니소스 : 이는 나의 부친 제우스 신이 일찍부터 정하신 대로다. (...) 아가베 : 저를 제 자매들이 있는 곳으로 데러다 주세요.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겠나이다. 저희는 핏빛 키타이론 산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 방황하겠습니다. 또한 신의 지팡이도 다시는 보지 않겠나이다. 노래도 부르지 않겠나이다. 다른 많은 사람이 바코스를 숭배하는 바코스 신도들이 될지라도 나는 꿈에도 그를 숭배하지 않겠나이다.
심지어 아가베의 마지막 대사가 숭배하지 않겠다로 끝난다. 이 극을 본 사람들은 마지막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가?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았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동욱 교수님의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의 자기기만 부분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재미있는 예를 소개한다. 한 여인이 누군가 전화를 걸어 명령을 내린다고 호소한다. "그는 자기가 하느님이래요!" 그녀는 하느님의 전화를 받고 하느님의 명령을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중이다. 누가 신의 명령을 거역하겠는가? 그녀가 신의 명령에 따라 설령 살인을 했다 한들, 누구도 그녀를 비난할 수 없으리라. 신 앞에서 감히 그녀는 어쩔 수가 없었을 테니까. 과연 그럴까? 그녀는 이런 의구심을 품을 수 있으리라. 전화를 걸어온 자가 정말 하느님일까? 혹시 장난 전화였다면? 아니, 정말로 내가 전화를 받기나 한 걸까? 하는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착각한 것은 아닐까? 이런 의혹에 대해 답해줄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사람, 그녀 자신이다. 그녀만이 자신이 받은 전화가 하는님을 사칭한 장난 전화라고, 또는 정말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결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하는 자가 아니다. 그 이전에 스스로 하느님의 명령을 받은 자가 되기로 '능동적으로' 결단을 내린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