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 Hazel Blog
  • 🌈by Hazel
  • ☀️Product Manager
    • PM, 제품팀, 로드맵
    • PM이 하는 일
  • 🗓️Torn Calendar
    • QAing 큐에잉
      • 프롤로그
      • 정말 이렇게 QA하는 게 최선인 건가?
      • QA 담당자가 생각하게 하지마!
      • 리드 제너레이션을 하는 방법
      • 만들기만 하면 돼!라는 착각
      • 유료화는 언제 해야할까?
      • 피봇을 결심하는 순간
      • 진짜 프리세일즈를 해보자
      • 언제 서비스를 접어야 하는가
      • 큐에잉이 안된 이유 3가지
      • 에필로그
    • 드라마 조연출이 하는 일
    • 0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 💡Sophia
    • 서양철학사
      • 왜 서양철학사인가
      • 고대철학
      • 밀레투스학파
      • 피타고라스학파
      • 엘레아학파
      • 다원론자
      • 소피스트
      • 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 Mission, Vision&Goals, Strategy
    • 오이디푸스 왕
    • 바코스의 여신도들
    • 진화론 시작하기
  • 📚book
    • 탁월한 사유의 시선
      • 1강 | 부정 否定 - 버리다
    •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
      • 1부 | 불변의 사실
    • 인스파이어드
      • Part 1 | 최고의 기술 기업에서 배운 것
      • Part 2 | 사람
      • Part 3 | 제품
      • Part 3 | 프로세스
        • 제품 발견 구조화 기법
        • 제품 발견 계획 기법
        • 아이디어 발상 기법
        • 프로토타이핑 기법
        • 제품 발견 테스트 기법
          • 사용성 테스트
          • 가치 테스트
          • 실현 가능성 테스트
          • 사업 유효성 테스트
          • 사용자 테스트 vs 제품 데모 vs 워크스루
        • 변화 기법
      • Part 4 | 문화
    • 승려와 수수께끼
    • 죽음의 수용소에서
      • 제1부 |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 제2부 |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 The Mom Test
      • 1장 | The Mom Test
      • 2장 | 잘못된 데이터 피하기
      • 3장 | 중요한 질문을 하기
      • 4장 | 편안한 분위기 유지하기
      • 5장 | 고객의 실제 관심과 구매 의향 확인하기
      • 6장 | 고객과의 대화 기회 찾기
      • 7장 | 올바른 고객을 선택하는 법
      • 8장 | 대화에서 배운 것을 실행으로 옮기기
      • 결론 | 더 나은 고객 대화를 위한 원칙
    • 스틱!
      • 1. 단순성
      • 2. 의외성
      • 3. 구체성
      • 4. 신뢰성
      • 5. 감성
      • 6. 스토리
    • 회복탄력성
    • 왜 일하는가?
      • 1장 | 왜 일하는가
      • 2장 | 일을 사랑하는가
      • 3장 | 무엇을 꿈꾸는가
      • 4장 | 노력을 지속하는가
      • 5장 | 현재에 만족하는가
      • 6장 | 창조적으로 일하는가
    • 그릿
      • 1장 | 그릿, 성공의 필요조건
      • 2장 | 그릿을 기르는 법
      • 3장 | 그릿을 키워주는 법
Powered by GitBook
On this page
  • 첫 시작
  • 고군분투
  • 결심
  • 선택의 기로
  • 제가요?
  • 패기갑, 첫 프로그램
  • 이게 드라마 조연출이지, 두 번째 프로그램
  • 메인으로의 승진, 세 번째 프로그램
  • 다시 원점으로, 마지막 프로그램
  • 고민의 궤적
  • 안녕을 고하며
  1. Torn Calendar

0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드라마 조연출 퇴사자의 변 (2020.07.27 ~ 2023.06.10)

만 3년의 기간, 드라마 조연출로 근무했다.

첫 시작

아주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초등학교 때부터 방송국에 대한 관심은 있었던 것 같다. 학교 방송국에서 점심시간에 방송을 하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초등학교를 세 군데를 다녔을 정도로 그 시절 정착을 하지 못했었기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 학교 방송국 활동은 해보지 못했었다. 중학교 때는 지원은 했었는데 떨어졌던 것 같고.. 고등학교 때는 춤 동아리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방송국은 들어갈 수가 없었달까. 아무튼 그렇게 방송과는 관련 없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나 싶었던 차에, 대학교 방송국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 당시에도 춤 동아리를 하는 중이었는데 그걸 그만두고, 방송국에 들어갔다. 그때 가장 친했던 친구가 대학 방송국에 지원한다고 하길래 나도 사실 따라서 지원했던 거였는데, 첫 지원에는 떨어지고 두 번째 지원에서 붙어서 들어갔다. 이때를 설명하면서 늘 나는 그냥 친구 따라서 들어갔는데...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내 기억보다 방송국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상당히 컸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어쨌든 내가 애정하던 춤 동아리를 그만둘 정도로, 또 재차 지원을 하고 필기시험, 면접을 볼 정도로 들어가고 싶었다는 거니까. 아무튼 그렇게 나와 방송의 연은 시작됐다.

고군분투

대학방송국 생활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개인 사비를 써가며 해야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고, 생각보다 많이 시간할애를 해야했으며, 매주 주간방송평가회의, 임원회의 등 이어지는 회의 일정들도 상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 안에서 난 행복을 느꼈다. 잠을 줄여가며 편집실에서 밤샘편집을 하고, 휴학을 하면서 방송제를 준비하고, 수업은 못갈지언정 방송은 모니터링하는,, 그런 일상이 왜 행복했을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음표를 던지자면.. 첫째는 하나됨, 둘째는 사명감이었던 것 같다.

하나됨. 우리의 일은 갠플이랄 게 없었다. 항상 서로의 일을 도왔다. 아나운서부가 발성 연습을 하고 있을 때면 나도 가르쳐달라고 하면서 복식호흡을 연습하는가 하면, 보도부가 취재를 가거나 인터뷰를 따러갈 때 기꺼이 따라가기도 했으며, 오디오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다른 부서 친구들이 영상 편집을 배우고 영상을 만드는 것 또한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선후배가 섞여있는 그 공간에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됨을 아마도 인생 살면서 처음으로 배웠던 것 같다.

사명감. 항상 방송 사고가 일어났을 때 우리는 '청취자들이 들으면서 얼마나 당황했겠어요!'라고 질책하곤 했는데, 사실 우리의 방송은 슬프게도 청취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또한 교내에 스피커가 설치되어있는 구간도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에.. 어느 누가 그 방송을 정말 청.취.하면서 당.황.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 아무도 당황하지 않았을 것임을,, 우리는 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정말 진지하게 임했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함을 항상 상기하면서 했던 것 같다. 또 중계방송을 할 때면 정말 공지 하나 하나가 중요했고 생방송의 무게감을 느끼기도 했으니, 매 순간 일의 무게감을 느끼며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결심

대학 방송국 일을 하면서 어떤 기술적인 능력치도 당연히 올라갔지만, 그것보다도 이 일에 대한 사랑이 커졌다. 방송제가 끝나고 심한 무기력함을 느끼기도 했고, 교환학생을 가서도 마지막 방송을 준비하면서 부담감이 커져서 이게 정말 행복한 게 맞나?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 어느날 새벽에 피씨방에서 예능을 편집하면서 혼자 웃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을 때, 새삼스럽게도 이 일을 너무 좋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모두의 앞에서 나는 '이 길을 걸어가겠노라' 천명했었다.

선택의 기로

나는 방송국에 들어가서 PD가 되겠다라고 이야기하고 다녔으니, 열심히 일을 찾아다녔다. 그 당시 점점 크고 있었던 한 예능 스튜디오와 지금 내가 퇴사를 하게 된 이 드라마 회사랑 우연히도 같은 날 면접이었다. 드라마가 먼저였는데 내가 마지막 순서로 들어가게 되어서 뒤에 예능을 거의 면접을 못볼 지경이었다. 그래서 화장실에 가서(아직도 이 화장실 뷰가 너무 생각이 난다) 둘 중에 뭘 봐야하나 고민을 하다가 예능 쪽에 전화를 해서 늦을 것 같다고 순서를 바꿔달라고 말씀드리고 결국 둘 다 면접을 봤다. 생각보다 그렇게 빡센 면접은 아니었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말씀드리고 나왔다. 그리고 사실 면접이 끝나자마자 빨리 이동해야 뒤 면접을 볼 수 있었던 상황이라 빨리 가야해!라는 생각에 긴장을 안했던 것 같다. 그렇게 면접이 끝나고 호다닥 택시타고 이동해서 예능 면접을 봤다. 예능 면접은 내가 들어가자마자 제가 앞에 다른 데 면접을 보고 오느라 늦었다고 말하고 시작해서 이미 망한 느낌이었다. 이미 면접관들은 '드라마가 좋아요? 예능이 좋아요?' '거기서도 같은 자기소개 했어요?' 등의 질문을 하고 있었으니,,, 게다가 나는 '드라마랑 예능 선택의 기로에 온 것 같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대답했으니 좋게 보였을리가 없었다. 그렇게 두 개의 면접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는데, 역시나 예능은 떨어지고 드라마는 붙었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드라마의 길을 가게 된다.

제가요?

사실 공고를 봤을 때는 '드라마 조연출 1년 계약직'이라고 되어있었기 때문에 정말 인턴 같은 정도의 일일 거라고 생각하고, 나한테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을 시키겠어?라고 생각하면서 들어갔는데, 웬걸. 오만 일이 다 내 일이었다. 대본 피드백도 쓰고, 촬영 팔로우도 하고, 미술 세팅도 하고, 헌팅도 하고, cg팀이랑 cg컷도 정리하고... 정말 내 생각보다 너무나도 큰 역할이었다. 그렇게 정말 말그대로 좌충우돌 천방지축 막내 조연출의 삶이 시작됐었다.

패기갑, 첫 프로그램

안녕하세요! 신입 조연출 ㅇㅇㅇ입니다!라는 인사에 돌아오는 질문은 항상 이것이었다. '근데... 몇살이에요?' 그도 그럴 것이 그때의 나는 스물넷이었다. 동기들도 20대 후반~3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질문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어리고 부족하지만 그때는 더 어리고 더 부족했으니, 날 후배로 받은 선배님들은 나를 보면서 참 한숨이 나왔을 것 같다. 어쨌든 난 당당하고 패기 넘치는 막내 조연출이었고, 선배들은 나한테 현장을 맡기고 내부로 들어갔기 때문에 현장엔 오롯이 나밖에 없었다. 참 그때를 회상해보자면 정말 매일매일이 치열한 싸움이었다.

출근 첫날 스토리보드 회의가 있었는데, 정말 모두가 나한테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었기 때문에 나는 당당하게 회의 중에 옆에 앉으셨던 촬영 감독님께 (그땐 근데 누군지도 모르고 말을 걸긴 했다) 대본 어느 부분을 가르키면서 이건 왜 이런 건지 물어봤었다. 그러고 잠시후 조용히 조연출 선배님께 한소리를 들었다. 감독님이 말씀하고 계신데 오디오 물리게 옆에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이미 첫날부터 혼이 났는데 그때는 '아니 자기들이 물어보라며!' 싶으면서 억울했더랬다. 그리고 그때는 감독님이 담배를 피우시는 분이어서 회의 하다가 담타를 가졌는데 나는 담배를 안 피우니까 당연히 안가고 회의실에서 좀 쉬고 있었다. 근데 또 나중에 연출 선배가 '아니 막내는 당연히 따라와야지 왜 안와?'라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또 2차 억울 '아니 자기가 오지 말라며!' 싶으면서 첫날부터 이미 억울함이 쌓였던 기억이 난다.

참 재밌는 일들이 많았다. 연출 선배를 항상 팔로우 해야한다!라는 특명을 주셨어서 나는 진짜 항상 옆에 붙어있으려고 노력을 했는데 좀 애매한 지점들이 있었다. 뭐.. 감독님이 조용히 담배를 피우러 가신다거나,, 그러면 나는 이거를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실 수 있게 해드려야하는건가.. 아니면 내가 따라가서 옆에 있어드려야하는 건가... 고민을 막 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내가 그렇게 고민하는 모습을 문틈새로 감독님이 보신거다. 그래서 또 동네방네 '이 막내는 내가 화장실 가는 것까지 따라올 기세다'라며 떠들고 다니셨던 게 생각난다. 또, 중간에 대본리딩을 틈틈이 했었는데 나는 정말로 단역 대사들을 내가 읽어야하는 줄 모르고 들어갔다. 대본리딩 시작하기 한 10분 전 쯤에 선배가 나한테 너가 읽어야해라고 하셔서 마음의 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리딩을 시작했다. 원래도 연기를 잘 못하는데 그때는 정말 심각하게 못했다. 어린 딸의 대사였는데 지문에 (콜록콜록)이 있어서 내가 콜록콜록이라고 했다가 진짜 욕을 지대로 먹었었다.. 그 대본 리딩 자리에서 연출 선배가 너 때문에 감정이 다 깨지니까 너 읽지 말라고 했을 정도였다. 잠깐 쉬는 시간에 비상계단 가서 연기 연습하고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소품팀한테 세팅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어봤다가 날 못 믿는 거냐부터 시작해서 자기 자존심에 스크레치가 났다는 둥,, 하면서 소품팀 팀장님이랑 싸우기도 했고. 내가 세팅 다 준비한 무술씬에서 진행을 보면서 연출부한테 큰 소리 낸 적도 있었고. 에이팀 촬영 끝나고 사무실 들어가서 숙직실에서 2시간 자고 다시 아침에 비팀 촬영 갔던 날들도. 너무 피곤해서 몰래 화장실 가서 졸았던 날들도.. 마지막 촬영 날 스텝버스에서 자다가 깼더니 이상한 장소에 내려져 있길래 여기 아니고 다른 곳이라고 알려주면서 나는 장소 미리 알려드렸었다고 버럭한 적도 있었다.

돌아보면 참 그땐 겁이 없었다. 막내의 특권이었던 것 같다. 막내니까, 첫 프로니까, 라는 프리패스로 난 뭘 몰라도, 뭘 못해도 크게 부담이 없었다. 그냥 당연히 모르는 거고 당연히 못하는 거고를 깔고 갔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또 힘든 일도 마음 편하게 힘들어할 수 있었다. 선배들한테 이런 게 고민이다 털어놓을 수 있었고, 마음껏 어리광을 부렸던 것 같다. 어느날은 촬영 끝나고 들어가서 선배들 만나서 나는 멜로를 하고 싶어서 왔는데 지금 스릴러 하는 게 너무 재미가 없고 왜 해야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얘기를 했더니 선배가 나한테 '그건 너무 대학생 마인드야'라고 팩폭을 해주셔서 정신을 좀 차렸던 것도 너무 기억에 남는 순간이다. 내가 여기저기 치이고 힘들어할 때면, 연출 선배가 '우리 모두가 다 겪었던 일이야. 시간이 약이야. 다 지나간다'라고 츤데레로 위로해주시던 것들도 너무 큰 위안이 되었다. 아무튼 첫 프로는 정말 많이 숨어서 울었고 또 활개치고 다녔으며 사람들에게 많이 기대면서 버텼던 프로였다.

이게 드라마 조연출이지, 두 번째 프로그램

꿈만 같은 한달 간의 휴가를 보내고 돌아와서 사극에 들어갔다. 그때는 사극의 두려움을 잘 몰랐었다. 사극이 왜? 그렇게 힘든가?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던 것 같다. 내가 출근을 했을 때는 사무실에 감독님, 캐스팅디렉터,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밖에 없었다. 내가 가장 먼저 붙은 조연출이어서 연출 선배와의 유대감이 상당했다. 아직 주연배우도 확정되기 전이라 컨택 중인 배우 얼굴에 사극 옷을 입혀보기도 하고, 인물관계도도 고민하면서 만들고. 첫 프로 때 중간에 투입돼서, 첫프로라서 무시당한 설움을 좀 풀 수 있었다. 이 시간이 곧 지나가고 사무실은 조연출 선배, 연출부들로 복작거리기 시작했다.

프리 때는 정말 많은 일정들이 휘몰아쳤었다. 주연배우 캐스팅부터 해서 여러 배역에 오디션을 진행했는데 이때 내가 상대 역할로 대사를 쳐주곤 했었다. 처음엔 예전에 너무 욕을 먹었던 기억이 나서 긴장이 됐었는데 하도 많이 하다보니 나도 익숙해지고 점점 연기 실력도 늘어갔던 것 같다. 대본회의에서 모두가 키스신을 주장해서 작가님이 급하게 짐을 싸서 회의를 나가신 일도 있었고.. (그 이후로 대본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헌팅을 4박 5일을 갈 정도로 지방 장소들이 많았다. 첫 헌팅 때 사진을 엄청나게 찍고 매일 헌팅이 끝나고 쉬기 바빴는데 그때 헌팅을 끝내고 서울에 올라와서 밤을 꼬박 새서 사진 정리를 하고 드라이브에 업로드해서 연출 선배님께 공유드리면서 정말 너무 힘들었어서 앞으로는 헌팅가면 매일 매일 사진 정리해야지 다짐했더랬다. 그래서 다음 헌팅 때는 매 장소 헌팅을 하고 이동하는 차 안에서 바로 정리를 했었다. 연출부 형님이 나보고 시바이치지말라고 했는데 실상은 정말 살기 위해서 정리했달까..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기억도 안나고 정리할 게 너무 많아서 정말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렇게 헌팅내용 딱 정리해서 마치고 올라가는 봉고 안에서 헌팅내용 정리한 걸 올리는 쾌감이 있었다. 장소회의, 연출부 씬바이씬, 미술팀 씬바이씬을 진행하면서 사람들과 얼굴도 익히고 우리 연출부의 정리력에 또 한번 감탄을 했었다. 연출부 언니오빠들한테 너무 많이 배웠다. 촬영을 나가서는 촬영감독님과 훨씬 가까워질 수 있었다. 운좋게도 첫 프로그램 때 같이 했었던 팀이 많았어서 훨씬 편하게 이야기도 많이하고 궁금한 것도 많이 물어봤었다. 현장에서 소품이나 자문 관련해서 바쁘게 뛰어다닐 일이 많았기 때문에 나름 현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조연출로서 뿌듯하기도 하고 재미있게 했던 기억이 난다. 이때 모든 서책들을 내가 정리했기 때문에 한자로 된 내용을 찾아서 상소문을 만들거나, 개인소장하고 있는 교수님 댁에 방문해서 한장한장 서책 사진을 찍어와서 소품을 만들기도 했다. 지금 떠올려보니 이때는 뭔가 어려울 수 있는 일들도 예상보다 쉽게 진행됐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속을 썩였던 소품은 용병풍이었는데 용 그림 작가님과 소통하면서 원하는 결과물이 안나와서 힘들었던 게 생각난다. 그래도 결국은 다른 작가님과 작업을 해서 멋있는 용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아직도 그 소품이 나오는 장면을 보면서 혼자 뿌듯해하곤 한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에서 후반 일정을 경험했다. DI, CG, 믹싱, 완제까지 후반 과정을 쭉 팔로우하면서 예고 편집도 해보고 새로운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이라고 해서 그럼 안 힘들었느냐? 그건 절대 아니었다. 우선 사극이라 지방을 많이 다니다보니 내 시간이 너무 부족했고 매번 출장 짐 챙겨서 출장갔다가 짐 풀기가 무섭게 다시 출장을 떠나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나는 헤어짐을 경험하게 된다... 선배들이 사극 들어간다고 했을 때 그럼 곧 헤어지겠네!라고 놀리곤 했는데 정말로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을 절실히 경험했다. 그 당시에는 일 때문에 헤어진 게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 일이 한 7할 정도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개인적으로도 힘든 일들이 있었고 사극이라 몸도 힘들었고..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서 정말 너무 감사한 조연출 선배님을 만나서 마지막까지 견딜 수 있었다. 조연출은 빈틈을 보이면 안되고 말로 사람들을 잘 설득해야하고 항상 긴장해 있어야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너무 여유로움을 탑제한 선배님을 만나서 나도 덩달아 여유로움을 배우려고 애썼던 것 같다. 그 시기의 나를 잘 붙잡아주신 선배님께 무한한 감사를..! 이런 저런 분들의 도움으로 그렇게 마지막까지 잘 버텼고 드라마의 결과도 너무 좋았기 때문에 분위기도 너무나 좋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코로나 시즌이었어서 회식은 하지 못하고 우리끼리 선물을 주고받으며 아름답게 마무리를 했다.

메인으로의 승진, 세 번째 프로그램

너를 메인 조연출로 받고 싶어! 라는 말은 그때의 나에게 상당히 설레는 말이었다. 이제는 조연출들이 상당히 빨리 승진하는 편이지만 그때는 내 바로 위 선배만 해도 막내를 3-4작품을 하고 서브를 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세 번째 프로그램에 메인을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정말 내가 선배가 되고 싶었다. 내가 메인으로 더 활개치고 싶었달까(이후에 반성하긴 했다). 아무튼 한 연출 선배님께서 나를 좋게 봐주시고 본인 프로그램에 나를 데려오고 싶다고 해주신 덕분에 나는 메인 조연출로 다음 프로그램을 가게 된다.

그렇게 희망에 부풀어 온 이 드라마에서 나는 나의 귀를 잃게 된다. 이때 딱 일주일 쉬고 다시 프로그램에 들어갔는데 이게 독이 되었던 것 같다. 의욕은 앞섰고 너무 잘하고 싶었고 그랬기 때문에 열심히 했다. 그러던 중에 한 갈등 사이에 내가 끼게 되었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속앓이를 꽤나 하고 있을 때였다. 딱 저녁에 밥을 먹고였나, 갑자기 너무 속이 아파서 화장실에 갔다가 어지럼증이 확 잃어서 정신을 못차리겠어서 잠깐 벽에 기대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뭔가 귀가 이상했다. 그래서 딱 노래를 스피커로 들어놓고 한쪽 귀를 막고 반대편 귀로 한쪽씩 들어봤는데 양쪽이 들리는 게 다른거다.. 왼쪽 귀가 피치가 더 낮게 들려서 바로 이비인후과를 갔는데 돌발성 난청이 왔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그때 바로 고막주사를 2주간 맞고, 무조건 쉬라는 처방을 받았다. 선배한테 상황 설명을 드리고 집에서 좀 쉬면서 일을 계속 했다. 귀는 많이 좋아졌지만 완전히 낫지는 않았고,, 이 이야기를 다른 조연출 선배들한테 했더니 아니 연출 하겠다고 베토벤 되는 거냐고 우스갯소리를 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이제는 웃으며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됐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나 슬펐었다. (지금도 잠을 잘 못자거나 스트레스 받으면 귀가 안좋아지곤 해서 꾸준히 신경쓰는 중이다. 뭐든 항상 건강 유의하시면서 하시기를) 그렇게 잠깐 쉬고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또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된다. 연출부분들이 정말 너무 일도 잘하시고, 너무 공유를 잘해주셔서 같이 즐겁게 또 열심히 일 할 수 있었는데 그것과는 또 다른 차원으로 너무나 '어른'이었다. 스물넷에 사회에 던져져서 부딪히면서 일하면서 그 속에서 제대로된 좋은 관계맺음이 뭔지는 크게 생각을 하지 못하고 지나왔던 나에게 정말 찐 '어른'이 사회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뭔지를 보여준 분들이었다.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만으로 너무나 감사한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물리적 고통은 피해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현대극의 탈을 쓴 이 이상한 시대극 같은 드라마는 거의 사극에 준하는 장소들과, 현대극임에도 한번의 카페씬이 없는 대기록을 세웠다. 게다가 엄청나게 자급자족했던 프로그램어었어서 그것에서 비롯된 웃긴 일들도 많았다. 생활 간지가 나는 소품을 구하기 위해 폐가도 들어가보고, 가정집에 무작정 인사드리고 찾아가서 물건을 빌려오기도 했다. 집에서 연기가 전반적으로 날 수 있도록 수제 스모그 통도 만들고, 밭에 얼갈이도 심어봤고, 오토바이 손잡이를 이것저것으로 얼추 비슷하게 만들기도 했다. 정말 재밌는 일들이 너무 많았어서 아직도 이 팀이 모이면 이야기할 것들이 넘쳐날 정도다. 이때는 그래도 연출부 제작부와 모든 촬영 스텝들이 하나가 되어 으쌰으쌰하면서 끝까지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촬영이 끝나고 같이 도래한 후반 작업은 나에게는 또 다른 관문이었다. 정말 내가 중심이 되어서 모든 일정을 계획하고 모든 팀들을 조율했어야 했는데 그게 어렵기도 했지만 나는 이때 너무 즐거웠다. 새벽에 끝나고 잠도 거의 못자면서 했는데 그럼에도 어떤 계획을 가지고 조정해나가는 과정, 마지막까지 디테일을 위해서 공을 들이는 그 과정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줬다. 물론 후반작업의 외로움도 있었고, 가끔 하소연하기도 했지만, 이때만큼 즐거웠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참 여러모로 고마운 작품이었다.

다시 원점으로, 마지막 프로그램

나의 귀가 증명했듯이 휴가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가능한한 최대한으로 길게 휴가를 보내고 다음 프로그램으로 들어갔다. 이번 작품 또한 사극이었는데 나는 사실 이미 한번 사극 해봤으니 껌이겠거니 하는 마음 반, 걱정 반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 대본도 많이 나와있었는데 사실 휴가 때 읽으면서 너무 재밌었어서 내가 이 작품을 할 수 있다니 너무 행복하다고 선배한테 연락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출근 첫날 사무실에 들어가서 대한민국 전도에 붙어있는 장소들을 보며, 아, 내가 했던 건 사극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 정도로 이미 사극을 경험했던 나에게도 생소한 장소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 후로 꽤나 긴 시간 동안 프리 단계를 거치고 그해 말 촬영에 돌입했다. 그렇게 촬영이 꽤나 진행되고 후반도 조금씩 시작을 하려고 할 때쯤, 나는 이 달리는 기차에서 내리기로 결심하게 된다.

정말 많은 고민이 있었고, 그 모든 고민이 모든 연결성을 다 잃어갈 때쯤, 마지막 끈마저 끊어지면서 이 일과, 이 작품과 나는 영영 다른 방향으로 튀어버리고 만다. 어떤 과정과, 이야기들을 기억으로 담아내기에는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내 마음속 마지막 관문 같았던 이 프로그램을 통해 [그리고 나는 이것이 어떤 계시라고도 생각한다]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온전히 내 선택으로 0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고민의 궤적

이 업에 대한 고민은 첫 프로그램 때부터 있었다. 그때는 68시간 세대였어서 하루에 16시간 촬영을 할 때였다. 그 16시간을 내내 서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인간이 이렇게 일을 할 수가 있구나 너무 놀라웠던 기억이 난다. 나만 체력이 쓰레기인 건가.. 싶을 정도로 처음에는 쉬는 날에도 걸어다니는 것도 힘들어서 운좋게 하루 쉬는 날이 있어도 내내 누워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을 그만두기에는 내가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정확하게 어떤 건지, 내가 잘 할 수 있는 건지 제대로 경험해보고 선택해야 온전한 선택이라는 판단이 들었고, 그렇게 그런 원동력으로 프로그램 마무리를 무사히 하게 된다.

그렇게 마무리를 하고 휴가를 다녀오니 그간의 고민은 빛이 바래있었다. 새로운 일들이 나를 각성하게 해줬고, 선배들이 으레 말했듯 막내를 벗어나니 훨씬 일이 수월해졌다. 그렇게 일의 즐거움을 찾고, 너무나 행복한 순간들을 때때로 맛보면서 '난 이 일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사실 일을 시작할 때부터 나는 아직 한 학기가 남아있는 상태였는데, 코로나의 영향으로 비대면 수업이 한창이었어서 원한다면 마지막 학기를 일을 하면서 들을 수 있었다. 첫 프로그램 때는 워낙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학기를 신청하고서도 도저히 감당이 안돼서 철회했었는데, 이 결심이 서고 나니 빨리 학교를 졸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쁜 와중에도 이동하는 차 안에서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면서 마지막 학기를 보냈고, 졸업했다. 마지막 학기를 듣게 했던 원동력은 이 일에 완전히 매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걸 다시 느낀다.

그렇게 순탄하게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고민은 완전히 뿌리뽑히지 않고 다시 제 싹을 틔워낸다. 아마도 내 귀가 말썽을 부렸을 때쯤이었던 것 같다. 건강의 문제도 있었고, 해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 운이 좋게도 곁에서 날 응원하고 보살펴준 많은 사람들 덕분에 한 고비를 또 넘기게 됐다. 그 덕분에 나는 모든 조연출의 과정을 경험해볼 수 있었고, 내가 처음 이 고민을 시작했을 당시 생각했듯이 모든 경험 끝에 온전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점에 도달했다. 계속할 이유도, 그만할 이유도 양쪽이 충분했고, 그 사이에서 나는 아수라 백작마냥 두 개의 자아를 가지고 그 고민의 시간을 견뎠다. 그리고 모든 고민 끝에 나는 그만해야한다는 친구의 손을 들어줬다.

안녕을 고하며

연인 간의 이별이 어떤 감정의 파도를 불러일으키고, 그에 걸맞는 시간을 쓰게끔 하듯이, 퇴사도 그러하다는 걸 배웠다. 퇴사는 어쩌면 일과의 이별, 일을 통해 관계맺었던 사람들과의 이별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회사가 나의 첫 직장이었으니 퇴사도 처음이었다. 첫 퇴사는 생각보다 나에게 큰 메세지를 주었다. 사람 간의 관계맺음의 중요성을 다시금 배울 수 있었다. 함께했던 분들께 한 분 한 분 연락드리면서 많은 분들이 그동안 나에게 과분한 애정을 주셨고, 또 나를 좋게 봐주시고 계셨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 나가는 경험을 하지 않았더라면 또 알지 못했을 것들이다. 그 과정에서 또 '어딜 가서도 잘 할거다'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그동안의 나의 노력과, 애정이 헛되진 않았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또 정말 어딜 가서든 잘 해내고 말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참 감사하다.

그리고 이제 넘어가서, 'Thank you, Next' 처럼, '그래서 뭘 하고 싶냐?'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다. 내 대답은 '재건'이다. 말그대로 나를 다시 세우고 싶다. 내가 토양이라면, 일단 토양을 다시 기름지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유하자면 지금의 나는 여러 작물들을 키우고 재배한 후의 토양이지 싶다. 다음 작물의 씨를 곧바로 뿌릴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절대 좋은 선택이 될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많은 분들이 조롱하셨지만, 요즘 뇌과학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다. 그리고 취미 생활로 이것저것 시작했는데 너무 바빠서 오히려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랄까. 미래에 대한 고민도 간간히 하고 있지만 지금 급선무는 역시 공부라는 생각이다.

유럽에서 교환학생을 할 때,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해서 어딘가를 같이 가기 위해서는 동행을 종종 구하곤 했다. 퇴사하시고 여행을 오신 분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는데, 그때의 나는 대학생이었고, 일이 너무나 하고 싶었던 사람이었으니, 그런 분들의 퇴사 선택이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또, 불안정한 생활로의 회귀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잠깐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의 방향이 맞다고 믿고 계속하는 것이 그것을 그만두고 나와서 새로운 방향을 찾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둘 용기가 생각보다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0으로 보낼 용기. 나는 이제 0에서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어려운 선택이었던 만큼 유의미한 과정으로 만들 작정이다. 화이팅.



Previous드라마 조연출이 하는 일Next서양철학사

Last updated 3 months ago

🗓️
Page cover im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