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사유의 시선
- 최진석 (1쇄 2017년 01월 20일)
대학교 때 정치철학 강의를 듣곤 철학이라는 것이 구태의연하고, 현실과는 괴리된 비생산적인 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단순히 이전 철학자들이 정치에 대해 어떤 철학을 전개했는가를 배우고, 과제나 시험에서 이를 논리정연하게 서술하는 것만 했고 그게 철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에서 교수님께서도 듣고 놀랐다고 하신 말씀을 보고 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철학이 국가 발전의 기초다.
이 문장을 듣고, '그렇지'라고 바로 생각할 수 있을까.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깊게 남아있는 '공부는 밥 벌어 먹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즉, 사치로 생각하는 인식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한국도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대학 진학률도 74%를 웃돌게 되었다. 그런데 그 교육의 내용물을 보면 교육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사치로 생각하는 단계인 것 같다.
상상력의 결여
아직까지도 질문보다는 답하는 것에 익숙하고, 이미 출제된 문제를 푸는 것에 익숙하고, 경쟁에 익숙하고, 따라하는 것에 익숙하다. 최근 만난 초등학교 선생님께서 '아이들이 그냥 만들어봐 라고 하면 시작을 못한다. 어떤 구체적인 예시를 보여줘야 그제서야 만든다.'라고 한 것이 마음에 남는다. 어렸을 때는 배우는 내용과 과정에서 그리고 크면 직업에서 그 현상이 나타난다. 그 현상이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후진국형 재난이다.
후진국형 재난이 끊이질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 그대로 우리 사회가 후진국형으로 재난을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가 아직 후진국형 관리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난이 일어나고 나서 그 원인의 초점은 다음 세 가지로 집중된다. 안전, 준비, 훈련, 이 세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이 안 지켜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세 가지는 모두 아직 오지 않은 것들,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일들에 대하여 미리 예비하는 태도들이다.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만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에 대한 대응력이 떨어진다. 현상 세계에만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구체적이지 않은 것에 접촉하려는 도전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안전, 준비, 훈련,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삶이나 사유가 지성적인 차원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양, 인문, 철학, 문화, 선진 그리고 선도적인 시선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오지 않은 것을 대비하는 것,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는 것, 이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이 일어난 후에야 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경쟁사 제품에 있으니까 우리도 해야해, 미국에서 비슷한 서비스가 잘 되니까 따라해서 만들면 성공할 수 있어 라는 '따라하기'가 바로 먼저 만드는 것을 못하는 상상력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도 AI 기술과 그것이 만들어낼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상상해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유연하지 않은 사고
사고가 유연하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최근 어떤 대화에서 사고의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연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A라는 새로운 의견을 이야기했을 때, 잠시 생각해본뒤 '일부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근데, 현실적으로 이러하지 않을까?'라는 답변이 이어졌다. 일부는 동의하고, 일부는 아닌것으로 판단했으니, 유연한 사고라고 봐야하는 것 아닐까?
왜 이 대화에서 유연하지 않음을 느꼈는지 생각해보면, 바로 '즉각적인 대답'에 있었다. 어떤 새로운 것을 인식했을 때, 그것을 제대로 보는 행위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본문에서는 물컵을 보는 일을 예시로 든다.
예를 들어 여기 물컵이 있다고 하자. 내가 "이 물컵을 보세요!"라고 말하면, 다들 바라보는 동작을 취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 물컵 자체를 보는 사람은 적다. 물컵을 보려면 판단하지 않고 보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의 시선을 물컵에 직접 가져다 붙일 수 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이 물컵을 보지 않고 그냥 '저것이 물컵이지'라고 판단한다. 시선을 물컵까지 가져다 붙이지 못하고, 중간에 '물컵이지!' 하고 판단해버리고는 시선을 이내 거두어들인다. 우리는 그것을 '본다' 혹은 '봤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것을 볼 때 기존의 가치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유연함이 부족하다. '진짜 그러한가?' '어떤 점이 그랬을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 등으로 좀 더 시선을 붙여두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유연성의 부족은 쉽게 논쟁으로 연결되곤 한다. 시선을 한 단계 더 위로 올리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하나를 아는 것만 가지고 논리를 만들며 싸우는 논쟁을 자주 하진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탁월한 사람은 논변에 빠지지 않는다. 논변에 빠진 사람은 탁월하지 않다. - 도덕경
지식은 근본적으로 무한 분화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것, 자신만의 제한된 개념을 가지고 얼마든지 자신을 꾸미거나 상대방을 괴롭힐 수 있다. 사회적으로 갈등이 있는 문제들을 보자. 찬성하는 이유도 수만 가지를 만들 수 있고, 반대하는 이유도 수만 가지를 만들 수 있다. 수만 가지의 양측 논변이 모두 다 논리적으로 치밀하다. 이처럼 대부분의 논변은 각자 자신의 관점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성적인 사람은 논변에 빠지지 않는다.
위대함이나 창의적 활동은 논변에 빠지는 일이 아니라, 논변을 끊고 그것을 성큼 넘어가는 일이다. 논변을 지성적인 지혜의 높이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내적 표현이라기보다는 지식이나 이론의 피상적인 조합에 머무를 뿐, 인격적인 깊이에 닿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논변이 피상적인 것임을 인식한 후, 그것에 빠져 허우적대지 말고 단지 수단으로만 사용해야 한다.
경쟁 사회
삶을 의미 있게 하는 요소가 어떤 것인가 하는 설문에, 17개 선진국 중 14개국이 가족과 아이들을 최우선 가치로 꼽은 반면 한국만이 물질적 풍요를 1위로 선택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사회 전반에 걸친 획일화된 가치관과 그에 따른 치열한 경쟁을 실감할 수 있는 결과다.
대학 입시, 취업, 결혼, 자녀 교육에 이르기까지 단 하나의 기준을 두고 경쟁해오는 삶을 이제는 제3자의 시선에서 더 멀리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치열한 경쟁은 그 속에 있는 우리가 하나를 두고 싸워야하는 과정 자체도 부정적이지만, 더 큰 생각을 할 수 없게 가로막는다는 한계를 느낄 수 있다.
경쟁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틀 안으로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과 견주거나 다투는 일이다. 경쟁의 구도 속에서는 이미 정해진 틀을 바꾸는 일이 불가능하다. 경쟁은 오히려 이 틀 자체를 공고하게 만든다. 그래서 경쟁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정해진 틀은 더욱 고착화되고, 이 고착화된 틀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길을 여지없이 차단한다. 경쟁이 갈등을 너무 과하게 조장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기도 하지만, 더욱 부정적인 점은 치열한 경쟁이 틀 자체의 변화를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진보가 어려워진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는 진보가 어렵다. 경쟁 구도 속으로 들어가는 한, 우리는 경쟁이 벌어지는 판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새로움, 고유함, 선도력은 시도되지 못한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경쟁 구도 속에서는 승리자도 패배자도 모두 행복하지 않고 피곤할 따름이다. 경쟁 속에서는 누구도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모두가 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승리자나 패배자나 모두 행복할 수 없는 이유다.
자아분열
이런 경쟁에 시달린 결과는 개인의 삶 속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출근하기 싫다', '일하기 싫다', '퇴사하고 싶다'라는 말을 한다. 또는 직장에서 자아실현을 꿈꾸는 것을 사치로, 또는 현실성이 없는 낭만으로 여기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 반증이 최근 늘어나는 사이드잡과, 부업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는 선명하게 기억나는 날이 있다.
처음 PM 일을 시작했을 때, 매일 출근하는 것이 즐거웠다.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눈을 뜬 그 순간부터 최대한 빨리 준비하고 나가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래야 더 빨리 회사에 도착해서 더 빨리 일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아침 8시 출근을 하고서도 오후 11시 퇴근하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때는 반대로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여는 순간부터 최대한 빨리 잘 준비를 하고 잠에 드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래야 잠을 충분히 잘 수 있으니까.
그러던 어느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간절히 더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연차 쓰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스스로 깜짝 놀랐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됐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일에 대한 몰입과 의지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몰입해서 일하지 않고, 일을 하나의 수단으로 보는 상태가 되었음을 자각했다. 자아분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한다. 즉 '직'을 갖는다. '직'이라고 하는 하나의 역할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구현한다. 그러면서 그 '직'은 자신의 '업'이 된다. '직'은 자기가 맡은 역할이고, '업'은 사명 혹은 자아실현을 의미한다. 직업이라는 말은 자신이 찾은 그 역할을 통해 자기를 완성해감을 의미한다. '직'은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직'과 '업'은 일체다. 자신과 '직'이 일체를 이룬다는 뜻이다. 이때 자신은 자신으로 살아있다. 그 직업 안에서 자신은 행복하고 충족감을 느낀다. 당연히 민감성과 예민함이 유지된다. 몰입도가 유지되어 창의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그러나 직과 업이 누구에게나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점점 '직'에 익숙해지면서 긴장감이 떨어지다 보니 '업'에 대한 각성이 느슨해지고, 서서히 '직'과 '업'이 분리된다. 자신이 맡은 역할은 그저 생계를 유지하거나 돈을 만드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 정도의 사람은 그저 '직장인'일 뿐이다. '직업인'이 아니다. '직'과 '업'이 분리된 사람들도 채워진 조직에는 부패가 만연하고 생기가 없다. '직'과 '업'이 분리된 사람들로 채워진 사회는 급격히 쇠퇴한다. 하지만 자신이 맡은 '직'을 '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돈 몇 푼에 부패하지 않는다. 그리고 몰입하고 창의적인 도전을 할 수 있다. 결국 내가 나로 존재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의 문제다.
나는 나로 존재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을 제3자의 시선에서 보는 것과 같이 바라보니 참 멋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는 일하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레 어떻게 하면 일이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으로 대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이 생겨났다.
꿈이 없는 세대
그런데 일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대하려면 일단 '목적'이 있어야 한다. 내가 나로 존재하려면, 내 삶을 통해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대해 죽음의 수용소에서, 퓨처셀프, 그릿 등의 많은 심리학 연구 책에서는 삶에 이유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스무살 때 '왜 살아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한 때가 있었다. 그때 주로 들었던 대답은 '인생은 원래 의미가 없는거야'라는 허무주의였다. 허무주의로 들어가는 순간, 모든 동력을 잃게 됐다. 내가 사는 이 단 하나의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굳이 견딜 이유가 있을까? 단지, 살아갈 수단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살아야할 동력을 찾기 어렵다. 여기서 많은 이들이 삶의 목적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내가 내일 죽는다고 한다면, 꼭 이루고 싶은 단 한 가지가 무엇인가라고 했을 때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한 가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꿈을 꾸는 삶이란 바로 ‘나’로 사는 삶이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자신의 내면적 욕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타인의 꿈을 대신 꾸거나 대신 이루어줄 수 없다. 꿈은 나만의 고유한 동력에서 생긴다. 대다수가 공유하는 논리나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에게만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발동해서 생긴다. ‘나’는 꿈을 꿀 때 비로소 참된 ‘나’로 존재한다. 이때는 내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옹골찬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차돌처럼 존재한다. 자기가 바로 참여자이자 행위자다. 비평가나 비판가로 비켜나 있지 않다. 구경꾼으로 살지 않는다.
이 대목을 읽고 생각나는 대화가 있다. 작업 중 한 팀에서 실수한 부분이 있어, 함께 문제를 해결한 뒤 나눈 대화였다. '우리 일이 잘못돼서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때 나는 살짝 어리둥절해졌다. 왜냐하면 나는 걱정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돕는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우리가 어떤 것을 원한다는 건, 꿈꾼다는 건 주변인으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시대의식의 부재
이러한 개인의 꿈의 부재는 시대 의식의 부재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독립, 건국, 산업화, 민주화처럼 그 나라가 끌고 갈 꿈과 이상이 설정되지 않은 것이다. 하나로 에너지를 모을 '사명'이 없으니, 모두가 추구하는 획일화된 가치를 좇아 경쟁하게 되고 결국 소모적인 경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선진화가 다음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건국—산업화—민주화 단계까지는 순조롭게 왔는데, 민주화 다음 단계의 목표 설정에는 아직까지 성공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화 다음 단계는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우리의 입장에서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선진화다. 우리가 앞에서 누누이 이야기한 문화적이고 철학적이며 예술적인 차원의 시선이 주도권을 발휘하는 단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선진화라는 목표를 설정하는 과업에서 아직 성공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것 자체의 난이도가 높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버거운 일이다. 건국이나 산업화나 민주화는 과제 자체가 눈에 보이고 매우 구체적이다. 선진국들이 이미 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비교적 구체적으로 알려질 수 있다. ‘따라하기’ 단계인 것이다. 그런데 선진화는 목표 자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어렵다. 그것이 문화적이고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시선을 구체화시키는 것이기에 그렇다. 이 선진화라는 목표를 채우는 내용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구체적이지도 않아서, 현실로부터 벗어나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르를 만드는 힘
그럼 우리가 이제부터 '선진화'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고 한다면, 무엇을 해야할까? 저자는 선진화를 이루려면 선도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선도력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남들보다 앞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물건이 되었든 제도가 되었든 혹은 보이는 것이든 안 보이는 것이든 간에 다른 나라에는 없으면서 자신들에게만 있는 고유하고 앞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무엇인가 새로 만들어지면서 이루는 일정한 범위를 '장르'라고 한다. 선진국은 바로 이 '장르'를 만든다.
어떤 나라가 문화적인가 아닌가 하는 점은 바로 장르를 만들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한다. 장르를 만드는 나라는 문화적 차원에서 움직이고, 장르를 만들지 못하고 수입하는 나라는 아직 문화적이지 않다. 장르를 만들면 그 장르가 새로운 산업이 되어서 경제적인 성취를 이루고, 경제적인 성취가 힘을 형성하여 그 힘으로 앞서나간다. 장르 - 선도력 - 선진은 이렇게 연결된다.
예전에 서울시청 앞을 지나며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서울시청 새로 짓는데 3000억 들었대, 그때 건축비 많이 썼다고 엄청 매체에서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흠 그렇게 욕먹을 일인가? 언제까지 가성비로 살래? 가치있는 거에 투자도 하고 해야지' 물론 정말 가치 있게 설계하고 합리적으로 투자해야겠지만 그 표현이 강하게 남았다.
언제까지 가성비로 살래?
전략적 사고
본문에서 철학을 다양한 표현으로 정의하고 있다. '가장 높은 차원의 생각 혹은 사유 능력을 발휘하는 것', '인간이 지성적인 차원에서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시선'과 같은 표현으로 설명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와닿는 표현은 전략과 전술에 비유한 것이다.
전략적 단계는 전술적 단계를 지배한다. 전술적인 단계보다는 전략적인 단계가 더 높다. 높을 뿐만 아니라 더 종합적이고 근본적이며 독립적이고 주도적이다. 전략적인 사고란 이미 짜진 판 안에서 사는 전술적인 사고와 달리, 아예 판 자체를 새로 짜는 일이다. 판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판을 새로 짜는 일에 대한 사고가 바로 전략적이다. 전략적으로 형성된 판 안에서 다른 여러 가지 종속적인 변수들을 다루면서 하는 행동들을 전술적이라고 한다.
전쟁을 일으킬 것이냐 말 것이냐, 전쟁을 일으켜서 국제 질서나 주변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새로운 구도로 끌고 갈 것이냐를 생각한다면 전략적인 사고일 테고, 전쟁이 벌어진 상황 안에서 상대방에 어떻게 대응하며 어떻게 공격할 것이냐, 어떻게 방어할 것이냐 혹은 병력을 어떻게 전개시킬 것이냐 하는 것들을 생각한다면 이는 전술적이다. 그래서 항상 전술은 전략의 제약 속에있다. 전술이 전략보다 높거나 넓을 수는 없다. 전술가가 전략가를 이길 수는 없다. 대개의 전술가들은 전략가들이 펼쳐놓은 판 위에서 놀 뿐이다. 전술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으면 자신이 전략가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조차도 알아채기 힘들다.
앞서 경쟁에 대해 이야기했던 내용과도 연결된다. 경쟁에 참여하는 것은 전술적 차원이라면 경쟁의 판을 짜는 것은 전략적 차원이다. PM으로서 문제를 정의할 때 하는 사고 흐름과도 연결된다고 생각된다. '랜딩페이지 전환율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하지?'라는 문제 정의를 가만 생각해보면 더 상위 문제에 '성장이 충분하지 않다'와 같은 상위 문제 정의로 넘어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꼭 랜딩페이지 전환율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제를 발견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보통 우리는 무엇을 하고 살 것인지에 몰두해 깊은 고민에 빠져들기도 한다. 연구를 하는 연구인으로 살 것인지, 군인으로 살 것인지, 사업가로 살 것인지 등등 말이다. 그런데 이런저런 구체적인 일을 중심으로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그런데 말이야, 산다는 것이 도대체 뭐지?"라고 하면서 생각을 다른 차원으로 끌고 가버리는 질문을 한다. 이런 질문이 제기되고 나면, 이제 연구인이나 군인이나 사업가로서의 좁은 범위를 벗어나 삶 자체의 의미를 실현하는 일로 상승한다. 이렇게 되면 사유의 시선이 이전보다 훨씬 높아지는데, 바로 철학적인 높이를 향하는 것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
그렇다면 철학적 시선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저자는 '자기파괴', '자기부정'을 첫 단계로 이야기한다. 새로운 철학의 탄생이란, 새로운 생각이 시간을 견디며 생존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또 믿음의 대상으로 바뀌고, 그 믿음의 체계가 다시 새로운 생각에 의해서 대체되는 과정의 반복이다. 이때 새로운 생각을 해내기 위해서는 기존의 믿음 체계로부터의 이탈, 독립이 필요하다.
독립과 예민함의 연관성은 인류 역사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인류 역사는 주변이 중심을 전복하는 사건들의 기록이다. 주변이 중심을 전복하고 나서 새로운 중심으로 성장한 후 또 새로 등장하는 주변에 의해서 다시 전복되는 일련의 과정, 이것이 인류 역사의 전체 흐름이다. 인류 역사는 한번도 예외 없이 소수가 다수를 전복하고, 그 소수가 다수를 형성한 다음 다시 새로 등장하는 소수에 의해서 전복되는 과정으로 이어져왔다.
어떤 ‘소수’나 어떤 ‘주변’의 출현은 역사적 책임성을 가진 새로운 흐름의 등장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새로운 흐름은 오직 예민한 사람에게만 읽혀진다. 기존의 문법이나 이념 혹은 신념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이 새로운 흐름이라는 것이 그저 낯설고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 새로운 흐름은 기존의 문법에 의해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법을 형성해나가는 물결인데, 익숙함에 빠진 사람은 기존의 문법을 가지고 그것을 해석하려 덤비기 때문이다.
기존의 것, 익숙한 것들이 낯설고 생소하게 느껴지는 분리를 경험해야, 즉 고독한 상태가 되어야 예민함과 호기심을 가지고 제대로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고독해져야 -> 예민함과 궁금증, 호기심을 발휘할 수 있고 -> 그래야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찰에서 생소함이 등장한다.
궁금증과 호기심을 지닌 채 진실하게 보고 집요하게 관찰하면, 대상은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 전혀 다르게 보이며 흔들린다. 이때 이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던 생소함이 등장하고, 그러면 깜짝 놀라게 된다. 그것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이Thaumazein’라고 했다.
고독을 자초하는 독립적 주체가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지고 어떤 것을 집요하게 관찰하면 그것이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면서 관찰자는 심리적으로 동요하게 되는데, 이것이 ‘경이’다. 경이는 익숙함과 결별하는 확실한 신호다. 독립과 고독은 이때 완성된다. 모든 철학서에 철학이 경이로부터 시작된다고 쓰여 있는 이유다. 경이로움 속에서는 가장 익숙했던 것이 가장 생소해진다.
그러한 생소함을 느꼈을 때, 관련이 없어보이는 것들 사이의 연결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이 상상, 창의, 창조로 연결된다.
스티브 잡스는 “창의성은 연결이다Creativity is just connecting things”라고 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 가운데 가장 탁월한 능력은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줄 아는 것이다. 전혀 다른 것으로 간주되던 이질적인 것들에서 유사성을 파악한 후, 그 유사성을 근거로 상호 개방시켜 접속해보는 일이 연결이다. 이런 활동을 총괄하여 ‘은유’라고 한다.
이 ‘연결’과 ‘은유’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확장한다. 확장이 개시되도록 꿈을 꾸는 일을 상상이라 하고, 확장이 전개되는 일을 창의라고 하며, 확장의 결과를 창조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 가운데 가장 탁월한 인간은 은유하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창조와 창의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즉, 철학을 한다는 것, 철학적 시선을 갖는다는 것은 이미 있는 생각들에서 벗어나는 고독한 상태에서 예민함, 호기심을 발휘해 관찰, 몰입함으로써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유사성을 파악하는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삶과 사회의 연결
그런데 개인이 철학적 시선을 갖는 것으로 사회가 선도력을 갖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개인의 성숙만으로 사회를 변화시킬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변화를 꿈꾸는 그 사람이 우선 성숙해 있어야 한다. 성숙된 개인은 그냥 '개인'이 아니다. 성숙의 높이와 깊이는 이미 그 개인을 넘어서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독립적 주체가 발휘하는 인문적 용기는 문명이나 국가나 사회나 인간이나 인류의 방향과 관련되는 일이므로 이미 사회적이다. 성숙한 개인은 자신의 개인적 성숙을 통해 사회적 역할을 한다.
그리고 더불어, 철학적 시선을 갖춘 청춘이라면 시대를 아파해야함을 강조한다.
철학적 시선이 무엇이고, 그 시선을 작동시키는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사람은 젊다. 젊은이라면 시대를 읽고, 시대를 답답해하고, 시대를 돌파해나가려는 꿈을 가져야 한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아파해야 한다. 거친 야망으로 가득 찬 짐승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미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고만 앉아서 그것들이 옳으니 그르니 하며 기존의 구조 속으로 편입되려는 사람은 사실 젊은이라고 할 수 없다.
나의 낡은 나라를 새롭게 하겠다. (이 나라는) 털끝 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그칠 것이다. 이러하니 어찌 충신 지사가 팔짱만 끼고 방관할 수 있을 것인가?
-다산 정약용
시대를 아파하는 것, 학생 시절에 오히려 더 공감했던 주제라는 생각이 들며 반성하게 된다. 이제라도 사회가 선도력을 가질 수 있도록 기여해야 한다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장르를 만든다는 건 한 사람이 목표로 삼기에 너무 요원해보인다. 개인이 장르를 만드는 일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 걸까? 여기에 대해 저자는 개인 차원의 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장르를 개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꿈’이다. 고유한 장르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가 그 사회의 선진성 여부를 보여주듯이 각자 개인들은 꿈이 있느냐 없느냐로 독립적이냐 아니냐를 보여준다. 여러분들이 지금 고유한 자신으로 고품격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 그 여부를 알고 싶다면 바로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나에게는 어떤 꿈이 있는가?”
꿈을 꿀 수 있는 용기
일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대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좋겠다와 같은 꿈을 말하면 '그런 건 불가능해', '너가 너무 이상적인 생각을 하고 있어', '그러면 좋지, 근데 현실적으로 어려워'라는 말을 듣게 된다.
나 조차도 그것을 어떻게 달성해야할지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정말 불가능한 것을 꿈꾸나? 내가 회사를 운영하는 자리에 있지 않아서 그런 걸까?' 라는 의문으로 남았다. 꿈을 향해 달려가기보다 꿈을 제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아래 내용은 나의 시야를 깨우는 것이었다.
꿈을 꾸는 사람이 현재의 문법에 갇혀 있으면 꿈은 항상 불가능한 것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꿈꾸는 일을 멈춰버리는 얌전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안전을 추구하기만 하고, 낙오되지 않으려고만 하고, 실패를 두려워한다. 꿈은 불가능의 냄새가 더 강하게 나야 진정한 꿈일 가능성이 크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꿈이다. 가능해 보이는 것은 꿈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괜찮은 계획일 뿐이다.
꿈을 꾸거나 꿈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우선 무모해야 한다. 무모함을 감당할 배짱이 없이는 꿈을 꿀 수 없다. 결국은 용기다. 꿈은 ‘뒤’가 아니라 ‘앞’에 있다. 앞에 있는 것은 기존의 익숙한 문법으로 해석될 리 없다. 그 꿈이 이루어지고 형성될 새 문법에 의해서만 해석될 수 있다.
'꿈'이라는 것의 정의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꿈의 뜻은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이다. 말 그대로 내가 이루고 싶은 이상인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이루고 싶은가'보다 '이룰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것이 가능한가 보다 그것이 해야만 하는 일인가이다. 우리는 이제 그 너머의 것을 보아야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각자가 이 삶에서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나만의 대답을 내놓아야할 때다.
어느 정도의 수양을 거치고 적당한 지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하나의 지향점을 발견하고 자신의 인생을 거기에 투입해도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해보자. 그가 정말로 고려해야 할 무엇인가가 따로 있겠는가? 나는 따로 더 고려해야 할 것이 없다고 본다. 거기에 몰입하는 일 외에 따로 고려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가 등장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책임지거나 감당하면 된다.
어떻게 이룰 것인가
사실 여기서 막막함이 다가온다. 서비스를 통해 교육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고 싶다는 꿈이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하는 문제가 남는다. '진정으로 원한다면, 방법은 찾기 마련이다'라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방법을 찾아 나서야 한다.
어떤 시도도 실패로만 마무리되는 법은 없다. 그 시도 자체가 이미 성공을 부르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실패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동력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 경험된 동력은 실패의 암울한 풍경 속에서도 꿈꾸는 자들을 더 심층적이고 새로운 곳으로 인도한다. 문제는 꿈을 꾸지 않는 일이다. 시도하지 않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를 넘어서려는 그 어떤 시도라도 감행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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