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 부정 否定 - 버리다
철학의 시작은 곧 전면적인 부정이고, 이것은 새로운 세계의 생성을 기약하는 일이다.
01. 명 明 - 대립의 공존을 통한 철학적 차원의 사유
지금 우리에게 철학이란 무엇이고 철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철학은 그 '내용' 자체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유' 즉 살아 있는 '활동'이다. 내용이야 각기 다르더라도 그런 내용을 산출하는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을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느냐가 중요하다. 철학적 차원에서 사유한다는 말은 전략적 차원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한층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는 뜻이다. 그렇지 못하면 상대방의 움직임에 종속적으로 반응하는 삶, 전술적 차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철학을 수입한다는 말은 곧 생각을 수입한다는 말과 같다. 생각을 수입한다는 말은 그 생각의 노선을 따라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의 종속은 가치관뿐 아니라 산업까지도 포함해 삶 전체의 종속을 야기한다. 생각을 수입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수출하는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들을 수용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 어려워져버린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결국 가장 높은 차원의 생각 혹은 사유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철학을 하는 목적은 철학적인 지식을 축적하는 일이 아니라, 직접 철학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철학을 수입하며 살았다. 능동적이거나 주체적이라기보다 종속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다. 지금까지 '따라하기'와 훈고에 더 집중하다 보니, 그것들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다가, 앞서려 덤비거나 창의를 발휘하려는 의지 자체가 줄어들었다. 선도나 창의에 대한 절실함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우리가 이제껏 가지고 살았던 시선의 높이로는 이룰 수 있는 최상위 단계에 이미 도달했으니, 이제 후퇴냐 아니면 한 단계 더 높은 발전을 향한 도전이냐 하는 기로 말이다. 지금과는 전혀 다르면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그 시선이 인문적 시선이고 철학적 시선이고 문화적 시선이며 예술적 시선이다. 이 차원의 시선을 우리의 것으로 가져야만 '따라하기'가 선도하기로 바뀌고, 훈고의 습관이 창의의 기풍으로 바뀔 수 있다.
02. 패 敗 - 서양에 의한 동양의 완전 패배
개념 철학이라는 학문은 원래 동아시아에 있던 학문 구조가 아니다. 이것은 서양의 학문 구조이고, 서양이 세계를 보는 전략적 시선의 총화다. '철학'이라는 지적 형식에 맞출 수 있는 내용은 있었지만, 그런 제목을 단 독립적 형식은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우선 동양 사회가 서양 철학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에 서양 철학이 들어온 일은 산업혁명 이후에 힘이 커진 서양의 제국주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산업혁명은 1760년부터 1840년 사이에 영국에서 시작된 공업화와 도시화를 가리킨다. 농업과 농촌 위주의 경제 구조가 공업과 도시 중심으로 급속히 바뀌면서 산업 생산력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팽창해, 팽창된 생산력을 유지하고 감당하기 위해서 새로운 원료,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 했다. 새로운 원료와 새로운 시장을 찾는 이 무력적인 강제 활동들이 바로 제국주의의 팽창이다.
중국의 철학
영국을 필두로 한 산업 선진국들은 외부로 힘을 팽창시키다 중국에까지 오게 된다. 은본위제 화폐 구조 속에서 은의 수요는 커지는데, 대중국 무역수지는 악화되자 1773년부터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세워 아편 밀무역을 본격적으로 실시하면서 중국의 아편 수입량이 급격히 증가한다. 아편 유행으로 경제적・사회적으로, 정치적 혹은 군사적으로 전면적인 위기에 봉착한 청나라는 아편을 몰수하고 소각하는 조치를 취하다가 1차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그 결과로 난징조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1860년 애로호 사건을 빌미로 일어난 제2차 아편전쟁에서 패하면서 베이징 조약을 맺는다. 1760년에 일어난 산업혁명의 결과가 1860년 베이징조약으로 서양에 의한 동양의 완전 패배가 증명된 것이다.
이후 중국인들은 어떻게 서양을 이겨서 실추된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할 것인가에 온 역량을 집중한다. 1860년 체결된 베이징조약 이후 중국의 행보는 구국구망, '조국과 민족을 구한다'에 초점이 맞춰진다. 구국구망하기 위해 가장 먼저 '서양 배우기'에 나서고 그 첫 단계가 대포와 군함으로 상징되는 과학기술 문명이었다. "오랑캐들의 좋은 기술을 배워서 오랑캐들을 제압하자"는 구호로 양무운동을 30년 간 진행하고 북양함대를 재건했다.
그러나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의 패배로 중국인들은 양무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철저하고도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한다. 과학기술 문명을 가능하게 해주는 더 큰 힘, 정치제도가 그 배후에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래서 1989년부터 다시 서양의 제도를 배우기 위해 변법자강운동을 일으킨다. 변법자강운동은 103일 만에 실패로 끝났지만, 이로써 중국인들은 과학기술의 배후에서 강한 힘을 발휘하는 정치 개혁이나 제도 개혁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할 정도로 사유의 높이를 상승시켰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제도 너머의 더 심층적인 힘을 찾는 데 주력했다. 중국인들은 그것을 문화, 윤리, 사상, 철학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때부터 신문화, 신사상, 신철학 운동을 일으킨다.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상, 새로운 철학을 가져야만 건강한 정치 제도가 가능하고, 이 건강한 정치 제도가 가능해야만 과학기술 문명이 발전하게 된다고 인식한 것이다. 한 마디로 압축하면 바로 '철학'이다. 부국강병의 가장 근저에 문화가 있다는 것, 사상이 있다는 것, 철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중국인들은 가장 높은 곳에 문화가 있고 사상이 있고 철학이 있다는 것을 역사적인 경험과 극복 과정을 통해서 확인한 것이다.
일본과 한국의 철학
일본은 1854년 3월 1일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서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강제로 개항한다. 일본으로서는 외국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역시 불평등 조약이다. 1867년에 막부 시대를 마감하고 왕정으로 복귀해 바로 이어서 과감하게 1868년부터 1889년까지 메이지유신, 중앙집권적 근대화 운동을 감행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효율성이 매우 높은 국가로 변모하고, 그로 인해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국력이 강해진다. 이 힘을 가지고 1875년에 조선 강화도를 강제 개항시켰다.
조선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 의해 병자수호조약, 흔히 강화도조약을 맺으며 강제로 개항한다. 일본의 개항 시점인 1854년과 조선의 개항 시점인 1875년 사이에는 약 20년 정도의 간극이 있다. 이 20년 동안 일본은 영국과 미국이 중국과 일본에 그랬듯이 다른 나라를 강제로 개항시킬 정도까지 부강해진다.
중국이 1860년 베이징조약을 체결하는 굴욕을 당하고 나서 바로 1861년부터 과학기술 문명, 제도, 철학으로의 역사적 진보를 이어갔지만, 철학적 시선의 필요성을 알게 된 것은 1917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1870년대에 이미 철학이라는 개념을 인식하고 그 높이에서 이루어지는 구상을 했다. 우리나라는 1924년 일제하에 경성제국대학이 생기고, 1926년에 최초로 철학과가 만들어졌다. 우리가 철학을 수용하는 발걸음을 막 떼기 시작할 때, 일본은 이미 철학의 생산 단계에 들어갔다. 철학의 생산은 곧 사유의 독립을 의미한다. 그 이전까지 조선은 근대적 의미에서 철학이라는 시선, 철학이라는 높이, 문화 자체에 대한 자각적 시각을 갖지 못했다.
03. 복 復 - 서양을 배우다
'지금의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해야만 하는 이유
중국인들이 서양을 배워갈 때, 1861년 양무운동, 1898년 변법자강운동, 1917년 신문화운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철학, 사상, 문화라는 것이 민족을 구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이라고 판단했다. 서양의 사상, 문화, 철학을 철저하게 배워야만 서양을 이길 수 있고 중국 민족을 구할 수 있으니, 지금까지 비효율을 발생시켰던 원천을 전면적으로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것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은 내게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효율적이고 핵심적인 방법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기존의 철학이었던 독일 관념론을 버리고 실용주의로 넘어감으로써 비로소 미국식 민주주의에 사상적 기초를 확보하는 미국적 독립을 완성했다. 미국은 최초로 평민들끼리 힘을 합쳐 만든 나라다. 평민들끼리 모여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나라를 만든다는 자각 속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이런 높이에서 하는 결정이나 선택이 바로 철학적인 시선이다.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철학은 '전략적인 높이에서 하는 사고'로 말할 수 있다. 전략적 단계는 전술적 단계를 지배한다. 전술적인 단계보다 전략적인 단계가 더 높고, 더 종합적이고 근본적이며 독립적이고 주도적이다. 전략적인 사고란 이미 짜진 판 안에서 사는 전술적인 사고와 달리, 아예 판 자체를 새로 짜는 일이다.
전쟁을 일으킬 것이냐 말 것이냐, 전쟁을 일으켜서 국제 질서나 주변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새로운 구도로 끌고 갈 것이냐를 생각한다면 전략적인 사고일 테고, 전쟁이 벌어진 상황 안에서 상대방에 어떻게 대응하며 어떻게 공격할 것이냐, 어떻게 방어할 것이냐 혹은 병력을 어떻게 전개시킬 것이냐 하는 것들을 생각한다면 이는 전술적이다. 그래서 항상 전술은 전략의 제약 속에있다.
중요한 것은 철학적 차원의 시선이다. 철학적 차원의 시선에서 철학적으로 자각해서 자신의 운명을 끌고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이자 철학적 삶이다. 반면, 종속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나라, 전략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고 전술적인 움직임만 보이는 나라들은 철학적인 차원에서 움직인다고 말할 수 없다.
철학적이고 문화적인 높이에서 국가의 진로가 결정되어야만 진정으로 독립적인 삶이 보장된다. 그 독립적 결정에서라야 지속적인 풍요와 번영이 보장된다. 독립적이지 못한 곳에서 형성된 종속적 풍요와 번영은 항상 흔들리기 마련이다. 주도권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지금 인문학인가?
지금 한국 사회에 부는 인문학 열풍은 바로 전술적 차원에서의 삶을 끝까지 가본 다음에 전략적 차원으로 상승하려는 필요와 욕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전술적 차원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전략적 차원으로의 상승을 하나의 '과업'으로 정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들은 전략적 차원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어 그것이 일상이 아닐 뿐더러 당연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 즉 인간의 동선이다. 인간의 활동을 가장 높은 차원에서 파악한 후, 그 높이에서 행위를 결정하면 전략적이다. 그 차원에서라야 비로소 상상, 창의가 가능하다. 창의적인 결과가 나오는 나라는 끊임없이 창의적으로 발전해가지만, 창의적인 결과를 내지 못하는 나라는 계속 내지 못한다. 창의적이고 싶어도 창의적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 숙명의 벽을 넘으려면 시선의 높이를 상승시키는 길밖에 없다. 그 높이가 바로 전략적인 높이다. 이 높이로 올라서야만 선도력을 가질 수 있다.
철학적인 단계로 진입하지 못한 단계, 즉 창의성과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는 단계에서는 이미 나와 있는 것들을 습득해 따라한다. 반면 철학적인 높이로 상승한 단계의 사람들은 전면적인 부정을 이야기한다. 전면적인 부정이 새로운 생성을 기약한다. 새로운 생성은 전략적인 높이에서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자신이 직접 그 길을 여는 일이다. 스스로 자신이 나아갈 길을 결정하지 못하는 한 종속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종속적인 삶을 사는 한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스스로의 삶을 꾸리거나 효과적으로 사회를 관리하지 못한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
1760년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이미 1820년이면 안정적으로 구조화된다. 그래서 세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1820년 즈음을 대분기(Great Divergence)라고 한다. 1820년경에 선진국의 자리를 차지한 나라는 지금까지 선진국이고, 후진국이었던 나라는 지금까지 후진국(중진국)이다. 선진국은 선진국을 유지할 시선의 높이에서 운영되고, 후진국(중진국)은 후진국(중진국)적 시선의 높이에서 운영되기 때문이다. 시선의 높이가 생각의 높이고,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며, 삶의 높이가 바로 사회나 국가의 높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진국이 선진국으로 올라서기가 그렇게 어렵다. 이미 익숙해져 있는 기존의 시선을 교체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볼 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상황이 바뀌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유지되던 사회 구조가 지금 흔들리고, 완전히 새로운 사회, 지식 정보사회 혹은 디지털 사회로 이동하고 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가 흔들릴 때 우리가 우리만의 주도권을 구성할 수 있는 틈새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이런 틈새를 놓치고 우리가 주도권을 형성하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또 몇 백 년을 더 종속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
전면적인 반성이 필요한 시점
냉정하게 본다면, 우리 사회는 아직 종속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가 살아왔거나 살고 있는 삶의 대부분이 '따라하기'라는 것만으로도 그 종속성을 말할 수 있다. 결국 생각의 차원에서 종속적이었다. 철학적으로 종속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은 종속적인 이 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인가, 아니면 좀 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 단계로 넘어서려는 시도를 한번 해볼 것인가, 이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가장 핵심적인 사명이다. 이 심각한 사명을 우리가 완수하지 못한다면, 다른 말로 삶을 철학적 차원으로 상승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이상의 독립, 이 이상의 자유, 이 이상의 성장은 누릴 수 없다.
조선의 철학자 다산 정약용은 관념적이고 훈고적인 조선의 사상을 실재적이고 독립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려고 매우 큰 노력을 하신 분이다. 이렇게 위대한 학자도 일본에 대한 판단은 매우 피상적이다. "지금의 일본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일본이 학문적으로 발전해 도덕적 성품이 높아졌기 때문에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등의 나쁜 습관이 사라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심리적 기대나 특정한 이념에 대한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런 순진함과 피상성은 피할 수 없다. 지금 우리도 아직 이 정도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낙 걱정된다. 다산이 이런 피상적인 인식을 남기고 사망한 후, 겨우 70여 년 만에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다.
19세기 이후는 이미 제국주의 열강들이 약소국들을 침략해 식민지를 넓히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때 다산은 그런 흐름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전쟁’이나 ‘침략’에 대해서도 단순하게 도덕적인 평가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과 '침략'이 좋고 나쁨의 문제에 해당하는 것이겠는가?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판이 짜여질 때 나타날 수밖에 없는 뒤틀림 현상이다. 세계가 새로운 판으로 재조정되는 과정이다. 문제는 전쟁이나 침략이 도덕적인 선악의 차원에 있는 것인지의 여부가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하게는 누가 주도권을 가지고 그것들의 발생이나 억제를 자기 통제하에 둘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자기 운명의 통제권을 자기가 가지지 못하면 종속적이고, 가지면 독립적이다. 통제의 결과가 성공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와 성공의 판 자체를 자기가 주도했느냐 상대가 주도했느냐 하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당했던 치욕 자체를 치욕으로 응시하고 전략적인 차원에서 대응하는 일을 제대로 해오지 못했다. 저주하고 한을 품는 일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이상 치욕을 당하지 않을 구체적인 방안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면적인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04. 력 力 - 문화, 사상, 철학의 힘
철학적이라는 것은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을 갖는 일
철학적 시선은 인간이 지성적인 차원에서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시선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앞선 철학자들이 남긴 내용, 즉 사유의 결과들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숙지한 내용들을 계속 퍼뜨리고, 또 그들이 남긴 철학적 내용 그대로 따라 사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사용했던 시선의 높이에 동참하는 능력을 배양해서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다시 말하면 철학이란 철학자들이 남긴 내용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삶의 격을 철학적인 시선의 높이에서 결정하고 행위하는 것, 그 실천적 영역을 의미한다.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철학이지, 철학적으로 해결된 문제의 결과들을 답습하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시선, 높은 시선이라는 것은 이미 익숙해진 것과의 결별이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철학을 한다는 것, 철학적이라는 것의 의미가 탁월한 높이의 시선을 갖는 것이라고 할 때, '자기파괴', '자기부정'의 과정은 그야말로 필수적이다.
철학적인 시선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다
탁월한 시선으로서의 철학적 사유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차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시를 이해하는 사람과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는 세계를 보는 통찰의 깊이와 높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언어를 지배하는 시인과 언어를 단지 사용할 뿐인 보통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시선의 차이는 매우 크다. 사실상 철학은 아주 높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고도의 지적 활동이다. 타고나지 않는 한, 훈련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다.
지성의 높이에 따라 그 사회의 수준이 결정된다. 수학은 지성을 고도로 발휘해 수나 도형이나 대수를 가지고 세계와 관계하지만, 철학은 ‘수’나 ‘도형’ 대신 ‘개념’과 ‘관념’을 사용해서 그 일을 한다. 우리가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을 갖는 것이 현실적인 지배력까지 보장해주는 이유는 세계를 그만큼 더 넓고 높은 데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성의 높이를 철학의 단계까지 끌어올린 사람은 그러지 못한 사람보다 세계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능력이 클 수밖에 없다.
판 자체를 새롭게 벌이려는 시도,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적인 시선은 세상을 바꾸는 힘을 제공한다. 세상 속의 잡다한 변화를 수학자가 '수'를 가지고 압축해서 포착해버리듯 철학자는 '관념'으로 압축해서 다룬다. 이것은 매우 높은 차원의 지성적 활동이기 때문에 거대한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여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거나 새로운 ‘방향’을 생산한다. 세상에 다른 흐름을 제공하기도 하고 세상을 새로운 방향으로 끌고 가기도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idea’가 그런 역할을 했다. 데카르트의 ‘물질’과 ‘정신’이라는 실체관도 근대를 수학적이고 양적이며 확실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서 근대적 세계관을 인도했다. 포이에르바하의 ‘물질’도 그렇고 프로이트의 ‘무의식’도 그렇다.
철학은 이처럼 세계를 바꾼다. 혹은 바뀌는 세계를 철학적 시선이 가장 앞서 포착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철학자는 항상 혁명가며 문명의 깃발로 존재한다. 철학적인 시선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도전이다. 철학적인 삶은 분명 또 하나의 세계를 생성한다. 판 자체를 보기 때문에 새판을 짤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삶은 변화의 맥락에 주도적으로 동참하는 능력이 떨어져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스스로 생산하기가 쉽지 않다. 판 자체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새판 짜기’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존의 판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삶’ 자체에 대한 인식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이미 정해진 삶의 방식을 답습하며 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남들이 먼저 생산해놓은 것을 따라하거나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만 한다. 지식의 축적 여부를 떠나 지성적인 높이를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가 그 삶의 격을 결정한다. 그 지성의 극처極處에 철학이 있다. 이 높이에서 한 결정들이 구현될 때, 대개 창의적이다, 독립적이다, 전략적이다, 선도적이다, 선진적이다, 새롭다, 지배적이다 등등의 평가를 듣는다. 그렇지 않으면 따라한다, 복제한다, 종속적이다, 피지배적이다, 전술적이다, 후진적이다, 구태의연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창의적이고 독립적이고 선도적인 일들은 모두 판을 새롭게 짜는 결과를 낳는다.
모든 철학은 시대의 자식이다
사유를 철학적인 높이에서 작동하는 일을 국가 발전에 큰 힘이 된다. 창의력이나 상상력이 발휘되어 주도권을 가진 나라라야 비로소 선진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이 바로 인문적인 혹은 철학적인 높이에서 발휘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철학에 국가 발전을 연결시키면 매우 철학적이지 않은 태도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철학을 보편적인 세계관이나 원리 등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으로 간주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철학 수입국이다. 철학을 수입한다는 것은 생각을 수입한다는 뜻이다. 생각의 수입은 삶의 기본 원칙들을 수입한다는 것으로 결국 종속성을 드러낸다. 독립적일 수가 없다. 사유의 종속성으로 창의적이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창의적 결과들을 따라하기만 하는 것, 이것이 철학 수입국인 한 벗어나기 힘든 치명적 문제다.
철학 생산국들은 다르다. 밖에 있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것이 독립적 사유다. 독립적 사유의 터전은 외부에 이미 있는 사유의 내용이 아니라 바로 자기가 처한 당장의 세계다. 그래서 그들의 사유는 그들이 처한 구체적인 현실 속, 역사적인 세계 자체에서 비롯된다. 이와 달리 철학 수입국들은 그 구성된 내용을 수용하기 때문에, 기성품으로서의 이론을 가져와서 자신들의 세계를 거기에 맞추려고 한다. 진리의 터전은 구체적인 세계인데, 만들어진 이론을 진리로 착각한다. 자신이 처한 세계에서 철학적인 이론을 꽃피우지 못하고, 수입된 철학 이론으로 자신의 세계를 관리하려 덤비는 것이다. 그러니 생산국에 비해 효율성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한쪽은 효율적으로 전진하고, 다른 한쪽은 비효율성을 계속 쌓아가다 보니 어떻게 해도 차이가 좁혀지기 힘들다.
철학이 자기 수양의 차원에서만 행해지고 추상적 논의에만 빠져 있다면 그것은 철학 본연의 모습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철학을 생산한 사람들은 모두 세계와 단절된 자신의 수양에만 관심 갖지 않았다. 철학 생산자들은 모두 시대와 세계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하게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모든 철학은 다 시대의 자식들이다. 시대를 건너가는 가장 높은 차원의 시선이 바로 철학이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우선 자신을 지성적으로 튼튼하게 하는 일이다. 모든 철학적 자산은 독립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철학을 통해 자신이 튼튼해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소득은 ‘높은 시선’이다. 높은 차원의 활동성이다. 이렇게 철학적으로 튼튼해진 사람은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고 새로운 빛을 발견함으로써 세계에 진실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보다 더 큰 사회적 역할이 있겠는가? 최종적으로 자기 내면이 얼마나 튼튼한가가 얼마나 사회적 역할을 진실하게 할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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