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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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Οἰδίπoυς τύραννoς Oidípous túrannos[], : Oedipus Rex 또는 Oedipus Tyrannus 또는 Oedipus the King)은 가 지은 아테네 비극이다. 에 초연되었다. 소포클레스가 지은 테베 세 연극(Sophocles' three Theban plays) 중 두 번째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시간 순서로는 첫 번째이다. 《》가 그 다음이고 《》가 시리즈의 마지막이다. 많은 사람이 소포클레스가 지은 테베 세 연극(Sophocles' three Theban plays)을 그리스 비극 명작으로 생각한다.
지금껏 끊임없이 읽히고, 재창조되는 [오이디푸스 왕]은 서구 문명의 원형이라고 불릴 만하며, 아들과 아버지의 대립, 친부살해, 정체성의 탐구는 인류 역사를 설명하는 하나의 모델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미덕은 오늘날의 독자가 읽기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탄탄한 구성에 있는데 가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비극의 전범으로 삼은 것도 그러한 까닭에서다.
오이디푸스 왕은 서구 문명과 정신사의 원형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끊임없이 연구되고, 재창조된 작품이다. 어머니와 아들의 애착,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은 의 '' 이론에 의해 설명된 바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오이디푸스의 갈망은 흔히 인간의 실존적 조건으로 해석된다.
-위키백과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에서 폴뤼보스와 메로페의 아들로 자랐으나, 친자식이 아니라는 소문을 듣고 이를 확인하고자 아폴론 신전에 간다. 예언자는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하고, 대신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라는 신탁을 내리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이 운명을 피하고자 집을 떠나고, 길을 가던 중 삼거리에서 한 무리를 만나 싸움이 붙어 무리를 죽이게 된다. 그 길로 테베로 간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의 왕이되고,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한다. 이후 테베의 역병이 창궐하자 오이디푸스는 이를 해결하고자 신탁을 받게 되는데, 선대 왕인 라이오스를 죽인 자를 찾아서 벌하라는 내용이었다. 라이오스를 죽인 사람을 찾고자 테이레시아스를 만나는데,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가 범인이라고 지목한다. 이에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가 2인자인 크레온과 계략을 꾸민 것으로 확신하고 두 사람을 엄벌하겠다고 하곤, 이오카스테와 이야기하던 중 라이오스가 삼거리에서 죽임을 당했으며, 그 아들의 손에 죽는다는 신탁을 받았음을 알게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닐까 불안한 와중에, 이전 고향인 코린토스에서 온 사자가 폴뤼보스의 사망소식을 전해주며 오이디푸스는 그들의 친자식이 아니라 테베의 다른 목자에게서 입양해 키운 자식이었음을 알려주고, 그 목자는 라이오스 집안의 목자로, 이오카스테가 아이의 발을 꿰어 목자에게 버리라고 했지만 불쌍해서 사자에게 전달해줬다는 이야기의 전말을 듣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신탁이 모두 이뤄졌음을 깨닫고,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찌르고 운명을 받아들인다.
오이디푸스는 왜 이런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 났어야 했을까? 그리스인들은 조상의 죄가 자식에게로 유전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오이디푸스에게 일종의 저주가 유전된 것이다.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사연이 있다.
오이디푸스의 할아버지인 랍다포스는 어렸을 때 쿠데타가 일어나서 권력을 잃고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웃나라에서 불쌍하게 여겨서 데려다가 키워줬는데, 10대가 된 랍다포스는 그 나라의 왕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를 동성 강간하게 된다. 이에 왕자가 자살하자 랍다포스는 저주를 받게 된다.
이 저주가 유전되어,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인 라이오스도 저주를 물려받게 되는데, 신탁을 받으니 아들을 낳으면 널 죽일 것이다라는 신탁을 받게 되고 아들을 버리게 된 것이다. 오이디푸스도 비슷하게 아버지를 죽이게 된다는 신탁을 듣고 피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신탁은 이뤄지게 된다. 인간은 운명은 피할 수 없었고, 신도 이미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없었다. 그리스인들이 운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다.
목소리는 같지만 발이 4개가 되기도 하고 2개가 되기도 하고 3개가 되기도 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두 알다시피 정답은 사람이다. 스핑크스는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처럼 이 질문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본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몰랐다고 볼 수 있겠다. 한마디로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건, 너는 너를 알고 있느냐? 를 묻는 것과 같다.
오이디푸스가 이 수수께끼를 풀었지만, 오이디푸스 극은 사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이야기와 같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두 자매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낳는데 둘은 누구인가?
또다른 수수께끼인 이 질문의 정답은 낮과 밤이다. 낮과 밤은 곧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간이 무엇인지 아는가?를 묻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낮과 밤은 극 속에서 시간이 지나면 결국 밝혀진다, 올 것은 오고야 만다 라는 상징으로도 표현된다.
그리스인들이 가장 경계한 것은 오만이었다고 한다. 그 시절 오만은 자기 운명을 거스르려고 하는 것이다. 운명 Moira 모이라는 '몫'을 뜻한다. 너의 몫은 이것이야, 이것에 만족해야 해, 그게 너의 운명이야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거스르는 것이 오만함이고, 신의 뜻을 감히 알고자 하는 것, 정해준 길을 거스르려고 하는 것이 오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받고선 순응하지 않고 그것을 피하고자, 나의 길을 가겠다고 한 것이 오만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그렇다면 왜 오이디푸스가 주인공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가 보통 비극 작품을 보면서 비장미, 카타르시스, 희열을 느낀다고 한다. 아마도 그리스인들에게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즉, 오만을 싫어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정말 원하기 때문에 오이디푸스가 운명을 거스르려는 '인간적'인 노력을 하는 모습에서 희열을 원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오만을 갈망한 것이다. 지혜를 소유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것과 친구가 되고자 한 '철학'과도 연결된다.
오이디푸스 : 나는 그 행운을 어머니 삼아 태어났으니. 나의 친족인 달님은 나를 작게도 크게도 정해 주었소. 나는 그렇게 타고났으니 앞으로 결코 다르게는 될 수가 없소. 나 자신의 혈통을 밝혀낼 수밖에 없소. 코로스 : 만일 내가 조금이나마 예언의 능력이 있고, 지식을 갖춘 현자라면, 오, 키타이론이여, 올륌포스에 맹세코, 그대는 내일 보름달이 뜰 때면 반드시 알게 되리라,
왜 달님이라고 했을까? 달은 초승달에서 보름달 그믐으로 가는 변전이 있다. 극에서 오이디푸스는 점차 수수께끼 같은 과거를 알게되면서 자신을 알아가고 있고, 결국은 스스로의 파멸, 어둠을 향해 가고 있다. 이 지점에서 마지막 한 조각을 앞둔 오이디푸스는 보름달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앞에서 낮과 밤 상징에서 보았듯 시간의 흐름이 결국 진실을 드러나게 해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피하고자 했으나, 결국 신탁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했다. 이 오이디푸스를 죄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코로스 : 오, 무서운 일을 행한 이여, 그대는 어찌 감히 그같이 그대 눈빛을 꺼 버리셨습니까? 대체 어떤 신이 그대를 부추겼습니까? 오이디푸스 : 그것은 아폴론이었소, 아폴론이오, 친구여. 나의 불행을, 불행을, 나의 고통을 완성한 것은. 하지만 눈을 직접 찌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가련한 나 자신이었소. 왜 그랬냐 하면 - 내가 눈을 뜨고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소? 앞을 보더라도 아무런 즐거울 게 없을 이 사람이?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찌른 행위가 아폴론이 부추긴 일이었다고 하지만, 결국은 스스로가 눈을 찔렀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운명이 정해놓은 길을 인간이 피해갈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죄는 인간의 몫이 아니라고 봐야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이 신의 뜻을 거스르려고 하는 오만을 사실은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리스인들은 신의 뜻을 거스르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어기고 싶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탁을 피하려 했던 오이디푸스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신의 뜻이 아니라 '스스로' 찔렀다는 점이 중요하다. 결국 모든 일은 운명대로 일어났을지언정,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죄를 벌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인 것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가 마지막에 모든 진실을 깨닫고 자신의 운명에 불평하지 않고 이를 수용하는 것은 운명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운명을 '스스로의 선택으로' 수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 사고의 흐름에서 오히려 오이디푸스를 죄인으로 보는 것이 인간의 선택을 존중하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