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빅터 프랭클이 만든 로코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 정신치료법 이론이다.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뜻이다. 로고스(Logos)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로, 로고테라피는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 나가는 인간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본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
인간이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그 사람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지 본능적인 욕구를 2차적으로 합리화시키려고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 의미는 유일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반드시 그 사람이 실현시켜야 하고, 또 그 사람만이 실현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 자신의 의지를 충족시킨다는 의의를 갖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의 이상과 가치를 위해 살 수 있는 존재이며, 심지어 그것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존재이다.
실존적 좌절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 의지도 좌절당할 수 있다. 이것을 로고테라피에서는 '실존적 좌절'이라고 하며, 이때의 '실존적'은 다음의 세 가지를 의미한다.
1. 존재 그 자체, 즉 인간 특유의 존재 방식 2. 존재의 의미 3. 각 개인의 삶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찾아내려는 노력, 즉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실존적 좌절로 인한 정신 질환인 누제닉 노이로제(noogenic neurosis)는 신경 질환 증세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성취로 보아야 한다.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것에 대한 절망도 실존적 고민이지 정신 질환이 아니다. 로고테라피는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그렇게 하려면 환자의 실존 안에 숨겨진 '로고스'를 스스로 깨닫도록 해야 하는데, 이때 인간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본능적 요소에만 국한하지 않고 실존적 현실, 즉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뿐만 아니라 앞으로 성취되어야 할 실존의 잠재적 의미까지도 고려 대상이 된다.
정신의 역동성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마음에 평온을 가져오기보다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면의 긴장은 정신 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돼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 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돼야 할 의미가, 다른 극에는 의미를 실현시킬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실존적 공허
실존적 공허는 20세기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현상 중 하나이다. 인간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된 후, 동물적인 본능과, 그간 자기 행동을 지탱해 주던 전통이 사라지면서 스스로도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게 됐다. 그 결과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동조주의) 아니면 남이 시키는 대로(전체주의)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실존적 공허는 대개 권태를 느끼는 상태에서 나타나며, 자살의 상당 수가 바로 이런 실존적 공허 때문에 일어난다.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우울증과 공격성, 중독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실존적 공허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현대의 집단적 신경증인 실존적 공허는 허무주의가 개별적이고도 개인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허무주의는 존재가 아무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가르침, 즉 인간은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의 결과물이거나 유전과 환경의 산물의 불과하다는 이론은 환자로 하여금 자기가 외적인 영향과 내적인 환경의 담보물이나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믿게 한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고, 인간의 자유 또한 제한되어있는 것은 분명하나, 우리는 자신의 조건에 대해 자기 입장을 취할 자유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의 의미
삶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시기에 따라, 시간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포괄적인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한 개인의 삶이 갖는 고유한 의미이다. 이런 의문에 포괄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체스 챔피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절묘한 수는 무엇입니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게임의 판세와 상대편 선수의 개인적인 성향을 고려하지 않은 가장 절묘한 수란 있을 수 없다.
인간 실존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개인에게 부과된 임무는 거기에 부과돼 찾아오는 특정한 기회만큼이나 유일한 것이다.
삶에서 마주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한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삶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의미는 각 개인이 지닌 절대적인 가치와 보조를 같이한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은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가치는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이 과거에 실현시킨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 사람이 쓸모 있느냐 없느냐 하는 조건에 기반을 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런 유용성은 그 사람이 사회에 이로운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기능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춰 정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사람이 이루어 낸 성과를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행복한 사람, 특히 젊은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요즘 사회의 특징이다. 실제로 이 사회는 그렇제 않은 사람들의 가치를 무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과 인간의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차이를 애매모호한 것으로 만든다. 만약 이런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의 가치가 오로지 현재 그 사람이 지닌 유용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히틀러의 계획에 따라 자행된 안락사, 즉 나이가 들어서, 불치의 병에 걸려서,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해서, 혹은 고통스러운 어떤 장애 때문에 사회적으로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사람들을 죽였던 '자비로운' 행위에 대해 변명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의 본질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이 말을 통해 사람은 현재가 지나간 과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고, 지나간 과거가 아직도 변경되고 수정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삶의 '유한성'은 물론, 그가 자신과 자신의 삶으로부터 성취해 낸 성과의 '궁극성'과도 대면하게 만든다. 무엇을 위해, 무엇에 대해, 혹은 누구에게 책임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본인의 판단에 맡긴다.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 내면이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이라 부른다. 즉,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 혹은 그 어떤 사람을 지향하거나 그쪽으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취해야 할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그가 대면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아 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써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우리 삶의 의미는 다음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두 번째는 사랑하는 것을 말하며, 세 번째는 시련을 통해 가능하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사랑의 의미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가장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으로써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과 개성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현돼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사랑의 힘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시련의 의미
아무리 절망스런 상황에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유일한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을 더 이상 바꿀 수 없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시련은 그것의 의미 - 희생의 의미 같은 -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
한번은 나이 지긋한 개업의 한 사람이 우울증 때문에 상담을 받으러 왔다. 그는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 것을 제외하고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자제했다. "만약 선생니밍 먼저 죽고 아내가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가 말했다. "오 세상에! 아내에게는 아주 끔찍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견디겠어요?" 내가 말했다. "그것 보세요. 선생님, 부인께서는 그런 고통을 면하신 겁니다. 부인이 그런 고통을 겪지 않게 한 게 바로 선생님입니다. 그 대가로 지금 선생께서 살아남아 부인을 애도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정상적인 의미의 치료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첫째 그의 절망은 병이 아니었으며, 둘쨰 내가 그의 운명을 바꿀 수 없었고, 그의 아내를 살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나는 바뀔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최소한 자기가 겪고 있는 시련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됐다.
심리학 교수 이디스 와이스코프 조웰슨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오늘날 정신 건강 철학은 인간은 반드시 행복해야 하며, 불행은 부적응의 징후라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가치 체계가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더 불행해지면서 피할 수 없는 불행의 짐이 더욱 가중되는 상황을 만들어 온 것이다." 사람은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나 혹은 자기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시련의 불가피성이다. 이런 시련의 도전을 용감하게 받아들이면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 의미를 갖게 되며, 그 의미는 글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보존된다. 다시 말해 삶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시련의 잠재적인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의미
어느 날 열할 살짜리 아들을 잃은 후 소아마비로 다리를 못 쓰는 큰 아들과 자살을 기도했던 한 어머니에게 저자가 물었다. "이제는 서른이 아니라 여든 살이고, 지금 임종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어떤 생각이 들까요? 자신에게 뭐라고 얘기할까요?" "내 얘기를 하자면 저는 제 삶을 평온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삶은 의미가 충만한 삶이었고, 그것을 성취하고자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 아들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따라서 제 삶은 절대로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임종의 순간을 맞아 과거를 돌아본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갑자기 자기 삶이 갖고 있는 의미, 그녀의 고통까지 포함된 자기 삶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게 됐다. 소아마비 혈청 연구에 사용되는 시험용 원숭이는 끊임없이 주사 바늘에 찔리고 또 찔리는 고통을 겪는다. 원숭이는 과연 자기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모임에 있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아니라고 대답했다. 원숭이의 지능으로 볼 때, 원숭이는 인간 세계, 즉 고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인간이 삼라만상의 진화 과정에서 종착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 세계를 초월하는 또 다른 차원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 인간이 겪는 시련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해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또 다른 차원의 세계 말입니다."
유사한 예로 영화를 들어보자. 영화는 수천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장면마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 개별적인 장면들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도 었다.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의 최종적인 의미 역시 임종 순가넹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최종적인 의미는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의미가 각 개인의 지식과 믿음에 최선의 상태로 실현됐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궁극적인 의미는 인간이 지닌 지적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이것을 초의미라고 부른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실존 철학자들이 가르친 대로 삶의 무의미함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절대적인 의미를 합리적으로 터득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삶의 일회성
인간의 삶에서 의미를 빼앗아 가는 것은 고통만이 아니다. 죽음도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삶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삶의 순간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시간들은 끊임없이 죽어 가고 있으며, 지나간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인생에서 정말로 무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잠재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가능성은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 바로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과거로 옮겨 간다. 이렇게 과거로 들어감으로써 일회성을 탈피해 영원한 실체로 보존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에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고정된 상태로 보존된다.
따라서 삶이 일회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삶의 일회성이 우리 책임 아래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일회적인 잠재 가능성을 우리가 어떻게 실현시키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수많은 현재의 가능성 중에서 끊임없이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한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을 무위로 돌리고, 어떤 것을 실현시킬까? 어떤 선택이 단 한 번의 실현을 '시간의 모래 위에 불멸의 발자국'으로 만들 것인가? 언제나 인간은 좋든 싫든 자기 존재의 기념비가 될 만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인간은 대개 그루터기밖에 남지 않은 일회성이라는 밭만 보고, 그 행동과 기쁨, 심지어는 고통까지도 구원해 준 과거라는 곡창은 그냥 지나치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는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져 있으며, 그 어느 것도 사라질 수 없다. 과거에 '그랬다'라는 것처럼 확실한 존재 방식도 없을 것이다.
기법으로서의 로고테라피
실제적인 공포를 로고테라피에서 어떻게 치료하는지 살펴보자. '예기 불안'은 환자가 두려움을 느끼면 바로 그 증상이 정말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반대로 꼭 하고 싶다는 강한 의욕, 즉 과잉 의도가 그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로고테라피의 '역설 의도(paradoxical intention)' 기법은 마음속 두려움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일을 생기게 하고, 지나친 주의 집중이 오히려 원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개발되었다. 이 치료에서는 타고난 유머 감각으로 자기 자신에게 초연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을 활용한다.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은 역설 의도라는 치료 기법이 적용될 때마다 발휘된다. 인간은 거리 두기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기 병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볼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땀 흘리는 것에 공포증이 있는 사람에게 땀을 많이 흘리게 될 것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일부러 사람들에게 자기가 얼마나 땀을 많이 흘릴 수 있는지 보여 주겠다는 생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충고했다. 그 결과 공포증으로 4년 동안 고생하던 그는 단 일주일 만에 병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두려움이 있던 자리에 대신 그 반대되는 소망이 들어가자 불안이라는 돛대에서 바람이 빠져나가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수면 장애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 불면에 대한 지나친 걱정은 결국 어떻게든 잠을 자야겠다는 과도한 의욕을 갖게 하는데, 이것이 오히려 잠을 잘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특별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환자에게 잠을 자려고 애쓰지 말고 반대로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해 보라고 권한다. 다시 말해 어떻게든 잠을 자야겠다는 지나친 집착은 잠을 자지 못할 것이라는 예기 불안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잠을 자지 않겠다는 역설 의도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경질환은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예기 불안과 같은 피드백 기제가 근본적인 발병 원인으로 보인다. 어떤 증세가 공포를 낳고, 그 공포가 다시 증세를 유발하고, 이번에는 반대로 그 증세가 공포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다. 반대로 강박과 맞서 싸우기를 중다나혹 대신에 아주 반어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비웃어 주면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고 증세가 점점 약해지면서 결국에는 없어지고 만다. 예기 불안은 역설 의도로 좌절시켜야 하고, 과잉 의도와 과잉 투사는 역투사의 방식으로 좌절시켜야 한다. 이때 치료의 핵심은 환자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데 있다.
범결정론에 대한 비판
범결정론은 어떤 조건이든지 그 조건에 대해 자기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인간관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간은 조건 지워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사랑가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어느 순간에도 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거대한 인간 집단의 행동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자룔르 통해서 얻은 사실뿐이고, 각 개인의 특성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채로 남아 있다. 어떤 예측이든 거기에는 그 사라밍 처한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에게는 그런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하다면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정신 의학
인간은 여러 개의 사물 속에 섞여 있는 또 다른 사물이 아니다. 사물들은 각자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에 있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타고난 자질과 환경이라는 제한된 조건에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려있다.
나는 살아 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 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
Last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