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수용소 생활에 대한 수감자의 심리 반응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이며, 두 번째 단계는 틀에 박힌 수용소 일과에 적응했을 무렵, 세 번째 단계는 석방돼 자유를 얻은 후이다.
첫 번째 단계
첫 번째 단계의 특징적인 징후는 충격이다. 정신 의학에는 소위 '집행 유예 망상'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 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생과 사를 결정하는 선별 관문과 우스꽝스럽게 벌거벗겨진 몸뚱이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섬뜩한 농담기로 넘어가게 된다.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결말은 어떻게 될까?' 같은 냉담한 궁금증을 느낀다.
두 번째 단계
그리고 두 번째로 어떤 환경에도 적응해 수면, 영양 상태를 비롯해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상대적인 무감각 단계로,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된다.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죽어가거나 또 이미 죽은 것을 너무나 일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수용소에서 생활한 지 몇 주가 지나면 그런 것들 때문에 더 이상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게 된다. 하지만 이런 무감각의 상태에서도 육체적인 학대와 고통과는 별개로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에서 비롯되는 분노를 느끼는 순간도 있다.
또한, 불확실한 현실에서 오로지 내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한 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지면서, 수감자들은 정신세계가 원시적인 수준으로 퇴보하는 '퇴행' 현상을 겪게 된다. 수감자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은 먹을 것에 대한 꿈이었으며, 틈만나면 먹는 얘기를 했다. 생각이나 의지가 없는 양떼처럼 무리 지어 다니며 오로지 두 가지 생각만 한다. '어떻게 하면 저 무서운 개들을 피할까, 어떻게 하면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영적인 생활을 더욱 심오하게 하는 것이 가능했다. 저자는 아침 일찍 작업장을 향해 가던 일화를 말해준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큰 돌멩이를 넘고 커다란 운덩이에 빠지면서 수용소 밖으로 난 길을 따라 비틀거리며 걸었다. 호송하던 감시병들은 계속 고함을 지르면서 개머리판으로 우리를 위협했다. 한마디도 하기가 힘들었다.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 때문에 누구든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높이 세운 옷깃으로 입을 감싸고 있던 옆의 남자가 갑자기 이렇게 속삭였다. "만약 마누라들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꼴을 본다면 어떨까요? 제발이지 마누라들이 수용소에 잘 있으면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을 몰랐으면 좋겠소." 그 말을 듣자 아내 생각이 났다. 빙판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수없이 서로를 부축하고,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면서 몇 마일을 비틀거리며 걷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지금 아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시를 통해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이렇게 내적인 삶이 심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체험하는 경우도 있었다. 저자는 또 다른 일화를 말해준다.
그날도 우리는 참호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잿빛 새벽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 위에 있는 하늘도 잿빛이었고, 창백한 새벽빛에 반사되는 눈도 잿빛이었다. 동료가 걸치고 있는 넝마 같은 옷도 잿빛이었고, 얼굴도 잿빛이었다. 나는 또다시 아내와 침묵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쩌면 당시 나는 내 고통에 대한 그리고 내가 서서히 죽어 가야 하는 상황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곧 닥쳐 올 절망적인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이 사방을 뒤덮은 음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절망적이고 의미 없는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느꼈다.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어디선가 '그렇다'라고 하는 활기찬 대답을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수평선 저 멀리 그림처럼 서 있던 농가에 불이 들어왔다. 바바리아의 동트는 새벽, 초라한 잿빛을 뚫고 불이 켜진 것이다. 어둠 속에도 빛은 있나니. Et lux in tenebris lucet.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심각한 무감각 현상과 정신적 퇴행 현상을 겪었다는 사실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는 어떤가? 어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에 아무런 정신적 자유도 없단 말인가? 저자는 수용소에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었음을 강조한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그렇기에 수용소 안에서도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나타나게 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가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그렇기에 수용소에서의 시련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도,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수감자들은 당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즉, 이런 형태의 삶이 끝날 것인지 말 것인지, 끝난다면 과연 언제 끝날 것인지 미리 예견하는 것이 불가능한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의 상태였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과거를 회상하려는 경향 즉,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행위에는 일정한 위험이 있었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음에도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끝을 알 수 없어 미래를 그릴 수 없는 상황에서 수감자가 삶의 의지를 유지하게끔 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 시간마다 생각해야 한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 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세 번째 단계
마지막 단계로 풀려난 사람들의 심리 단계이다. 자유. 저자는 스스로 몇 번이나 이 단어를 되뇌었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지난 몇 년간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면서 얼마나 자주 이 단어를 입에 올렸는지 이제는 그것이 의미를 잃고 말았다. 현실이 우리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자유가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글자 그대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갇혀 있다가 석방된 죄수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신 의학적 용어로 '이인증'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또한 심한 정신적 압박을, 그렇게 오랜 시간 받았던 사람에게는 자유를 얻은 후 도덕적 결함을 보이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자유의 몸이 됐으니 이 자유를 마치 특허를 받은 것처럼 잔인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더불어 비통함과 환멸을 마주할 가능성도 있다. 고향에 돌아온 수감자들이 겪게 되는 무관심과 상투적인 인사치레는 자신이 과연 무엇 때문에 그 모든 고통을 겪었는지 허탈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몇 년 동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시련과 고난의 절대적인 한계까지 가 보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직도 시련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시련에는 끝이 없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시련을 더 혹독하게 겪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환멸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지금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언젠가는 그때를 돌아보며 자기가 그 모든 시련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날이 올 것이다. 마침내 해방의 날이 찾아와 모든 일이 아름다운 꿈처럼 여겨진 것과 같이 수용소에서 겪었던 모든 시련들이 언젠가는 하나의 악목으로 생각될 날이 올 것이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 세상에서 신 이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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